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의아함
안녕, 잘 지내니? 내 옆자리에 앉아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치던 너를 기억해. 변성기가 올락 말락 하던 때 작은 체구로 나를 놀리고 웃던 너의 이름을. 너의 이름은 동민이었고, 우린 고작 열한 살이었지. 내게 장난을 치던 너에게 뭐라고 되받아치기만 하면 네가 습관적으로 하던 말이 있어. 기억조차 나지 않겠지만 너는 늘 ‘대들지 말라’고 했지. 듣자마자 누가 누구한테 대드네 마네 하냐고, 너 나랑 동갑이라고 반문하던 내게 너는 그냥 그건 그런 거라고 했어. 여자애가 남자애한테 ‘대든다’는 말이 절대 틀릴 리 없다는 듯하던 네 태도는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해.
몇 년 전에 결혼한 내가 얼마 전에 남편에게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 택시만 타면 일어나는 불쾌한 것들에 대해 읊어대며 택시 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할 때 자기는 그런 일을 절대 겪어본 적이 없다는 거야. 영업 개시 이후 첫 승객으로 여자를 태우면 부정 탄다며 기분 나빠하거나, 돼먹지 못한 성희롱을 일삼거나, ‘어린’ ‘여자’가 감히 일씩이나 하러 회사에 가냐는 듯한 뉘앙스로 사람 기분을 종잇장처럼 구기거나 하는 일들. 뻔뻔하게도 길을 돌아간다거나, 치마를 입고 차에 올라타는 다리를 빤히 쳐다본다거나 하는 일들도. 허무하더라. 나를 포함해 무수한 여자들이 지금 이 밤에도 실시간으로 겪고 있을 흔하디흔한 일들이 남성인 나의 반려자에게는 한 번도 겪지 못한 희귀한 일이라는 게.
자그마치 이십이 년이 흘렀어. 네가 동급생 중 하나였을 나를 까마득하게 잊고 살고 있을 오늘까지.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은 우리를 이전과는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을까? 우리가 처음 졸업한 학교인 초등학교를 지나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대학생이 되고 또 모든 학교들을 졸업한 사회인이 되어서 회사에 들어가도 지뢰는 도처에 깔려있어. 불합리해 보이는 일들이 끔찍한 악몽처럼 끊임없이 반복재생되지. 수백 명이 넘게 앉아 일을 하고 있는 우리 회사 건물에 여성 임원은 내가 모시는 상무님을 포함해 고작 서너 명이야. 우리 조직 전체에 있는 임원으로 범위를 넓힌들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지. 5%도 안 될걸. 거의 구색 맞추기처럼, ‘우와 다 남자네’하기 딱 1초 전에, 그 정도로만 여성 임원이 배치되어 있어. 애초에 남성 임원이라고는 따로 호칭이 없어도 ‘여성 임원’이라는 호칭은 뭔가 특별히 불리지. 여성 임원을 5%에서 8%로 늘리면 엄청난 발탁 인사가 있었다며 뉴스에서 으스대기도 한다고.
이 슬픈 역사는 내 출생 이전, 그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을 거야. 열한 살이었던 동민이 네가 나한테 대드냐는 말을 일말의 계산도 없이 자연스레 할 수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어릴 때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내 인사를 본 체 만 체 하셨어. 몇 살 어리던, 다른 거라곤 몇 살 어린 나이와 성별뿐이었던 내 동생만 그 집에서 유일한 환대의 대상이었지. 가계와 집안일에는 누가 봐도 엄마가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엄만 늘 뭔가 모자란 며느리라고 타박을 받았고. 추석이나 설 때 양가 부모님 댁에 갈 때도 여성들 앞에서만 터지는 지뢰는 널려 있지. 왜 우리 동생은 처남이 되고 남편네 남동생은 도련님일까, 이상하게 생각한 적 없었니? 왜 나는 내 남편의 손아래 여동생에게 아가씨라고 불러야 하는데 우리 형부한테 난 고작 처제여야 하는 걸까. 아내도 남편이 살던 집에선 손님인데 왜 일이라도 거들지 않으면 못된 며느리가 된 것처럼 다들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릴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이상해.
서른셋이 된 지금의 너는 어때? 여전히 말다툼하다 네가 마음에 안 드는 말을 내가 하면 나는 너에게 ‘대드는’ 걸까? 요즘의 여성 인권 논쟁에 대한 너의 생각도 궁금하다. 혹시 너도 ‘82년생 김지영’을 불온서적 취급하며 ‘페미나치’들이 득실거리는 하 수상한 세월을 헤쳐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을지 말이야.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여성혐오 범죄나 가해자의 큰 비중을 남성이 차지하는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등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오던 남자를 ‘쫓아온다’고 인식하며 여자들이 바들바들 떨 때마다 혹시 너도 분노했을까. 모든 남자가 범죄자가 아닌데 왜 싸잡아 매도하느냐고. 불쾌하다고. 불쾌함? 남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단지 불쾌하지 않을 권리가 생존하고 싶은 본능보다 중요해질 수는 없을 뿐이야.
나는 사실 정말 필요 없어. ‘여성 전용’ 열차 칸이니 ‘여성 전용’ 귀갓길 동행 서비스라든지 하는 그런 것들.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 ‘남성 전용’이 생겨야 할 만큼 여성의 전유물이 흘러넘치는 세상에 하루라도 살다가 죽을 수 있을까. 나 살아생전에.
그래, 어쩌면. 열한 살의 너와 서른세 살의 네가 사는 세상에서 여자들이 누리는 것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조금 변했을 수도 있어. 우리 집에서 가계 기여도가 더 큰 사람도 남편이 아닌 나고, 대부분의 공학에서 여자 애들 성적이 월등히 높다고들 하더라. 교사 임용 시험에서도 성적순으로 순위를 매기면 여초 직업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순위권 안에 남자가 적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 그렇지만. 그런데 말이야. 어느 특정한 개인, 어느 특정한 집안이나 집단에서야 발군의 여성이 돋보일 수 있다는 건 불행하고 서글픈 일이야. ‘소멸’을 목표로 존재하는 여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없는 것보다야 든든하지만 속상한 일이야. ‘여자’임이 부각되지 않아도 좋은 모든 대명사에 ‘여자’라는 꼬리표가 달라붙는 것도, 피해자일 때나 가해자일 때나 늘 뉴스 헤드라인엔 ‘여자’가 부각되는 것도 엄청 피곤한 일이란다. 겪지 않으면, 인식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피곤함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좀만 봐주라. 여자들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남자들 역전당하려면 진짜 한참 멀었거든. 네가 볼 수 있는 상사 중 단 1%라도 여성의 비중이 더 커질 때, 권력형 범죄 가해자의 과반이 여성이 될 때, 너의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동급생 여학우에게 ‘어딜 대드냐’는 소리를 아무런 계산 없이 들을 때, 그때가 역전의 시작일 거야. 동민이 너 같은, 일반 남성들이 관성을 깨지 않으면 결코 오지 않을 시작이기도 하지.
우리, 그때 다시 얘기하자.
커버 사진 속 문구 ‘Femmes en colère’는 영어로 옮기면 ‘Women in anger’, 우리말로 ‘분노에 찬 여성들’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