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컬러 세상 속 저채도 인간의 삶에 대하여 (‘人 Between’의 삶)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자격지심
어렸을 때부터 줄곤 생각해온 사실 중 하나였다. 나는 ‘애매하다’는 것. 키도 애매하게 크다. 안 크다기엔 좀 크고, 모델이라도 할 키는 또 못 된다. 모두에게 환영받을 예쁜 얼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두의 입방에 오를 만큼 못생긴 것도 아닌 것 같다. 집안의 포지션마저 애매하기 짝이 없다. 말 잘 듣고 예쁜 세 살 터울 언니와 일곱 해의 터울을 두고 태어난 유일하고 귀한 아들내미였던 내 동생 사이에 콱 끼어 있었으니까.
비교적 궁핍했던 시간은 내 인생 타임라인의 곳곳을 점유하고 있었지만 일정 수익을 꾸준히 내는 교육공무원의 딸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도움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일반계 대신 특목고를 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철렁했었는데- 애매하게 가난한 것은 지극히 가난한 것보다 못했다. 그 사실을 나는 학창 시절 동안 연거푸 실감했다.
공부도 애매하게 잘했다. 서울대를 들어가기엔 모자랐고, 다른 어느 이름 모를 학교에 들어가기엔 머리에 든 게 좀 많았다. 서울대든 어디든 들어가서 그야말로 지성을 ‘빛내며’ 점점 더 뛰어나지는 고등학교 동창들을 소셜 미디어 피드에서 수두룩하게 마주치는 사이 심리적 어깨가 조금씩 굽었다. 사실 공부를 좀 못해도 좋았다. 재능이 뛰어나다면 그걸로 먹고살아도 충분한 세상이니까. 안타깝게도 내 재능은 어디에서도 발군이 되지는 못했다. 글씨를 제법 잘 썼지만 나 정도로 잘 쓰는 사람은 많았다. 나의 글을 좋아하는 지인들이 꽤 있었지만 내 글을 써서 밥이 벌어먹어지지는 않았다.
신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페미니스트라기엔 나는 제법 사회의 시선에 맞춰 여성스럽게 꾸미고 싶고, 가부장제를 타파하자고 하고 싶지만 기혼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아직은 아이를 갖겠다는 계획 같은 것은 없으므로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가정도 꾸리지 못했지만. 성격마저도 애매함을 피하긴 어려웠다. 착하다기엔 좀 못됐고, 밝다기엔 좀 어둡고, 마냥 어둡다기엔 조금 왁자지껄했다.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기에는 어중간하게 우울했고, 삶을 포기하기엔 그렇게 용기가 있지는 못했다.
……뭐 이따위지?
가끔은 인생이 통째로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지, 잘되지는 않았지만 잘못되지도 않았으니 내 인생이 잘못됐다기보다는… 이렇게 애매한 사람으로 이 척박한 시대를 관통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그렇다고 다시 태어날 수도 없었다. 인생을 새로 살려면 지금 인생이 마쳐져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발을 영영 떼기엔 눈에 밟히는 게 많았으므로.
다시 돌아보면 달라질까 싶어 삼십 년 조금 넘게 살아온 내 삶을 되돌려 생각해 봤지만 애석하게도 삶을 통째로 톺아봐도 나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늘 끼어있었다.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 예쁘고 덜 예쁜 사람들 사이에, 마르고 통통한 사람들 사이에. 큰 키와 작은 키 사이, 유복함과 궁핍함 사이, 똑똑함과 바보스러움 사이에.
RGB 컬러 체계에서 조합 가능한 컬러 코드의 수는 16,777,216이라고 한다. 이 컬러 체계를 인생에 대입해보자면- 나같이 애매한 사람은 회색이 도는 어떤 하나의 색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5d5d5d일 수 있고, 어떤 날엔 #c9c9c9일 수도 있다. 회색 같기는 하지만 베이지 빛이 오묘하게 도는 #87837c일 수도 있을 것이다. #494949이면서 #bcc4d4일 수는 없지만, 애매한 색이 누릴 수 있는 커버리지는 그만큼이나 넓다.
그렇게 나를 새로 본다. 내 삶에 애매한 것들만 있대도 결국 이 애매함도 16,777,216분의 1로 확실히 수렴하는 거라고. 애매하기에 넘볼 수 있는 코드도 그만큼이나 많다고.
人 Between* ― 그러니까 중간인(中間人)인 삶도 마냥 구리지는 않은 것이다. 결국 누구나 16,777,216 중 하나의 코드만을 손아귀에 쥘 수 있을 뿐, RGB 팔레트에 정답이라는 건 없으니까.
* 부제 속 ‘人 Between’: ‘in between(1. 중간에, 사이에 끼어, 틈에 2. 중간적인, 어느 쪽이라고도 할 수 없는)’이라는 표현에서 in을 글 주제에 맞게 사람 인(人)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