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웃으면 나는 싫어

넌 장난이라 해도

by 임우유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환멸감



네가 웃으면

나는 싫어


 여자들 사이에서는 불행한 맥락으로 통용되는 키워드가 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12월 24일에 가장 비싸고 25일 크리스마스 당일부터 가치가 수직 낙하한다는 그 케이크. 거기에 여성의 나이를 빗댄 농담을, 여자로 태어나면 한 번쯤은 꼭 듣게 된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내 나이는 스물여섯이었고, 나의 첫 사수는 나보다 몇 살 위인 미혼 남성으로 뺀질이 이미지와는 달리 일 잘하고 나름 준수한 사회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이성의,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사수라니 퍽 어려운 상대였지만 처음엔 그에게 일말의 기대라는 것을 했었다. 나처럼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실수하면 그걸 지켜보다 조심히 체크해 두고,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조용히 나를 타일러줄 수 있는 사람. 애정을 바탕으로 그런 일들을 해줄 사람이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순진하게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믿음은 부지불식간에 깨어지지도 않았다. 조금씩, 어수선하게 부서져 내렸다. 의도하지 않고 내뱉은 말들에 기인한 부서짐이었다. 의도하지 않고 그런 말들을 내뱉는다는 것이 오히려 더 정떨어지는 포인트로 작용했다.


 모 여성 가수의 상반신 누드 사진이 유출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생활할 때 사기당하듯 찍힌 사진이 유출된, 가엾고 억울한 케이스였다. 본업을 잘하는 실력파 가수였는데 어쩌다 그런 일에 엮이게 되었을까, 듣자마자 짠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상반신 누드 사진이라니- 그 사진은 수많은 단체 카톡방, 1:1 카톡방 등에서 보란 듯이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고, 그런 불행의 재생산으로 당사자가 겪어야 할 절망의 크기는 얼마나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이내 그 생각을 멈춰야 했다. 생각하다 보면 나도 불행하고 슬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날 우연히 그 사건에 대해 나의 사수가 하는 말을 들었다. 유출된 사진을 보았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봤지. 근데 안 보는 게 나았겠던데.”


 기대했던 것보다 그 사진 속 몸매가 볼품없어서 차라리 안 보고 상상으로 남겨두는 것이 나았겠다는 맥락이었다. 듣는 순간 그에 대한 신뢰감이 바닥나는 소리가 들렸다. 사회초년생의 천진함 탓이었는지 바닥난 신뢰와 기대가 마이너스 구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까진 알지 못했다.




 어떤 날은 그날 입은 옷과 매무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어떤 날은 그날 함께한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순서로 앉아 있었는지까지도 떠올려낼 수 있게 또렷이 기억되곤 한다.


 그에 대한 기대감이 폭파 수준으로 무너져 내린 그 날 나는 중식당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와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왼편에 앉아 있었고, 예닐곱 명이 성별에 치우침 없는 구성으로 앉아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나의 사수와 그와 몹시 친하게 지냈던 협력사 모 사원과의 사담이 시작됐다. 시답잖은 이야기가 계속되던 중, 돌연 듣기 싫은 소리가 고막을 뚫고 진입했다.


 “여자는 스물다섯 넘으면- 알잖아요, 크리스마스 케이크. 여자 전성기는 딱 스물다섯까지지.”

 “(경박한 톤으로)그죠그죠. 남자는- 남자는 솔직히 서른 넘기면서부터 리즈 아닌가? 그렇지 않아요?”


 스물여섯의 내가 그걸 듣고 있었다. 분노한 사람이 나뿐인가 싶을 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여성분들이 그 말에 격노하기 시작했다. 사수보다 위 연배의 여성들이었다. 깨갱거리는 척하면서도 그 말에 틀림은 없다는 눈빛을 대화 상대와 주고받으며 히죽거렸다.

 그날 나는 내 사수가 싫어졌다.




 나이를 한살 두살 더 먹어갈수록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악에 대한 아우라와 호불호의 경계일 것이다. 악의 없이 악한 농담을 하는 사람이 점점 더 싫어진다. 그게 악한 줄도 모르고 농담이라고 내뱉는다는 게 더 싫다. 남의 불행과 불안을 아무렇지 않게 말로 집어 던지는 사람, 가난과 장애를 농담 소재로 삼는 사람, 내가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이유로 싫어하는 무엇에 열광하는 사람……. 그런 사람 중 하나를 사수로 맞이했던 것은 돌이켜봐도 너무도 어리고 여렸던 사회 초년생에게 참 가혹했다.

 쌉소리 하지 말라고 단칼에 쳐낼 강단이라도 생긴 지금 만났더라면 나았을 텐데, 그런 말 듣고도 아무 대꾸도 못 했던 그때의 내 처지가 아쉽고 가엾다. 이 글을 볼 리 없겠지만, 이 화면을 빌려서라도 사수한테 몇 마디쯤 해야겠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요즘 일도 많이 편해지고 잘 지내신다면서요. 솔직히 저한테 그땐 좀 심했던 거 아시죠? 뭐, 그래도 돌이켜보면 선배한테 배운 게 있긴 있었네요. 유유상종. 선배랑 친하게 지냈던 그 사람 있잖아요, 딸 둘에 애처가라던. 그분, 저한테 회식 때 뭐랬는지 알아요? 그날 그분 생제르맹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요, 업소에서 ‘언니들’이 그 유니폼 보고 ‘오빠~ 이건 무슨 옷이야? 사인트게르메인?’ 하더랍디다. 그 말 하면서 엄청 웃더라고요. 그게 웃긴가요? 참. 제 앞자리에서 통화하면서 선배가 성매매 업소 얘기하던 거, 저 다 들었어요. 제가 모르는 언어로 얘기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요새 그런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요. 조심 좀 하시고요. 아, 그리고 얼마 전에 딸 낳으셨던데. 선배, 진짜로, 제가 이건 정말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건데. 애처가라던 그분처럼은 되지 마세요. 부끄럽지 않은 아빠 되셔야죠, 언젠가 장성한 선배 딸이 선배가 웃을 때 싫어지면 안 되잖아요. 우리 부끄럽지 않게 삽시다, 좀.

 아 근데 선배, 그때 그 말이 진짜 웃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