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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Jul 31. 2020

당신의 특별함에 건배

어릴 적부터 난 존재감이 정말 없었을까

어릴 적부터 난 존재감이 없었지 / 주목을 받은 적 단 한 번도 없어


 강렬한 노래 속 유독 귀에 때려 박히듯 잘 들려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많이 회자되기도 했던 저 ‘어릴 적부터 난 존재감이 없었지’는 모 아이돌 그룹의 데뷔곡 가사였다. 강한 비트로 메워진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지만 나는 종종 이 가사 앞에서 마음이 움츠러들었음을 고백한다. ‘어릴 적부터 난 존재감이 없었지 / 주목을 받은 적 단 한 번도 없어’라는 가사가 들릴 때 일견 서글픈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별 후 들린 사랑 노래는 아니지만, ‘내 얘기 같아서’였다.




 나의 어릴 때는 예쁘고 말 잘 듣는 언니와, 나이 터울이 제법 많이 나는 남동생 사이에 끼어 정말이지 존재감 없이 흘렀다. 나의 모든 것이 애매하게 느껴졌다. 물론 모든 것이 다 나쁜 것보다는 나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한 번도 내가 특출 나게 무언가를 가졌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주 못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길 가다 뒤 돌아볼 정도도 아닌 외모. 머리가 나쁜 편보단 좋은 편에 가까웠다고 믿고 싶지만 전교 1등을 해보거나, 내로라하는 명문대에 입학할 정도는 아니었던 성적. 키가 적당히 잘 자라줬지만 모델을 해보라는 권유를 들을 정도로 크지는 않은 신장. 적당히 말랐지만, 아주 깎아놓은 듯한 날씬함과는 거리가 있는 몸. 영 소심한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대범하지도 못한 어중간한 성격. 착할 거면 누구라도 인정할 만큼 착하든가, 나쁠 거면 혼자라도 어떻게든 잘 살아남을 만큼 나쁘든가 해야 할 텐데 ‘착하다’고 표현하기엔 내가 봐도 난 좀 못됐다.

 모든 것이 다 나쁜 것보단 나았으니 괜찮다고 자위하고 싶었지만 해가 지날수록 애매한 사람의 삶은 애매한 지점으로만 수렴하는 것 같았다. 열 개의 성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홉 개는 그저 그렇더라도 단 하나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무언가가 있어야 성공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성격이 나빴지만 전교 1등만 내리 거머쥘 정도의 동창처럼, 예쁘다는 말과는 거리가 좀 멀어도 타고난 아주 큰 키와 워킹으로 런웨이를 활보하는 어느 모델처럼.


 직장에 다니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선 더 큰 불안감에 시달렸다. 일을 압도적으로 잘하든가, 아예 일을 못해서 애초에 기대치가 너무 낮아 뭘 해도 그러려니 넘겨지는 사람이 된다면 차라리 더 나을 텐데, 어디에도 속하질 못했다. 상사의 눈높이를 맞추는 법에 정통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상사 따위 무시할 만큼 속이 태평하지도 못했다. 대각선 자리 차장님처럼 헌신해서 회사를 다니는 것도, 티 나게 노는 것도 아닌 채로 회사에서도 평생 이렇게 애매하게 살다가 애매하게 죽을 것 같았다. 여태 내가 그려온 애매함의 궤적을 생각하면 단명도 장수도 아닌, 애매하게 늙은 나이에 숨을 거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렇게 애매하게 살던 내가 작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인터뷰를 지인들로부터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독립출판으로 펴내는 책에 싣기 위해서였다. 서면 인터뷰를 요청한 지인들에게서 온 문장들을 보니 놀랍게도 궤를 같이 하는 특징들이 있었다. 그렇다, 내게도 특별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지인들이 설명한 나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남들이 변화라고 느끼지 못하는 작은 변화까지 알아채는 사람. 카페에서 예쁜 컵을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다른 컵들과 어떤 점이 달라서 그 컵이 매력적이고 아름다운지 열댓 개의 이유를 대서라도 설명할 수 있는 사람.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아, 저분은 말린 장밋빛 립스틱이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하고, 어울릴 만한 화장품을 브랜드까지 추천할 수 있는 사람.

 한편 머리부터 발끝까지 궁금함으로 들어찬 사람이기도 했다. 남들이 묻지 않는 무엇까지도 궁금해하고, 답을 얻을 때까지 조바심이 나기도 하는 궁금 덩어리. 예쁜 컵인데 컵 바닥에 브랜드가 적혀있지 않으면 어떤 브랜드인지 알아내고 싶고, 자기 전에 갑자기 떠오른 영화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으면 무슨 영화였는지 너무 궁금해서 잠도 못 잘 정도로 호기심이 남다른.


 서로 다른 말로 쓰인 나에 대한 설명이 어떤 특징들로 옹기종기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안도했다. 누구에게나 특별함은 있는 것이었다. 일평생 이렇게 애매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있었으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분명 당신을 당신답게 만드는 당신만의 특별함이 있을 것이다.


 발견해낸 나의 특별함이 꼭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과하게 디테일하고 쓸데없이 궁금함이 많은 피곤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분명 나만이 가진 고유함이고, 특별한 부분이니까. 작사가 김이나 씨가 한 강연에서 말했듯, 누군가의 과잉은 그만큼의 재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러니 우리 모두,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찾지 못했더라도 내일은, 내일이 아니면 일 년 뒤에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보낸 하루하루들이 당신만의 특별함을 분주히 쌓아 올리고 있을 테니까.


 모쪼록, 당신의 특별함에 건배!



p.s. 앞서 언급한 아이돌 그룹의 가사 ‘어릴 적부터 난 존재감이 없었지 / 주목을 받은 적 단 한 번도 없어’의 바로 다음 가사는 ‘나는 하나뿐인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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