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예요
2022/03/30(수) 19:30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OP 1열
110분(인터미션 없음)
56,000원(세계여성의날 기념할인)
프리다 최정원
레플레하 리사
데스티노 정영아
메모리아 허혜진
멋진 인생 따위 없어도 돼
화려한 조명도 필요 없어
조금만 숨이 남아 있다면
아직 사랑할 힘이 남아 있다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
MARAVILLOSO!
오랜만에 힐링/위로가 넘치는 극(사실 엄청 울었다)
무대 조명, 음악, 네 분의 케미로 정말 꽉 찬 무대
예습 없이 갔던 탓에 처음 시작하고는 취향이 아닌 것 같아 살짝 걱정했다.
그런데 'The Late Night Show'와 '프리다의 인생'이 소름 돋게 교차하면서,
기쁨, 행복, 고통, 환희, 재미, 사랑, 슬픔 등 어마어마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1. 자화상
프리다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이유:
"상처가 나면 치료하고 나았는지 계속 들여다봐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더라고요."
본인을 돌아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고 행복을 발견하는 프리다-
그리고 무대에 혼자 서서 연기하는 정원 프리다는 소름 끼치게 멋있었고, 프리다가 그때 느꼈을 고통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몸동작, 시선, 감정 뭐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었다.
2. 순교
"아무도 쉴 수 없는 인터미션"이 지나고 (사실 밴드 소개 ) 시작한 2막.
작은 극장에서 관객들과 천천히 눈을 맞추는 배우님들에게 받았던 위로는 대단했다.
다 좋았지만,
특히! 좋았던 것은
2막 시작 후 정원 배우님이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은 채로
극장을 찬찬히 둘려보며 관객들과 눈을 맞추고는
"제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그려드리고 싶어요. 사랑합니다."
라고 속삭이듯 말해 주었을 때다.
본인의 상처를 돌보며 그림을 그렸다던 그녀가 그려주는 '나'는 어떨까 생각해 보니 그랬을까...
그녀와 같은 어려움은 지금 내 삶에 없지만
어쩌면 더 안타깝게 살고 있는 2022년의 나에게 100년 전에 살았던 프리다가 담담하게 전하는 위로 같았다.
프리다는 아빠가 달아준 거울을 보며 몸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던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들은 그녀를 일으키는 수단이자 거울이고, 삶의 유일한 기회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림이 돈이 되어야만 했던 그녀가 찾아간 곳이 바로 그녀의 코끼리 디에고.
인상 깊었던 연출이었는데, 디에고와 결혼하는 프리다가 머리에 쓴 면사포가 가시 화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디에고는 그녀에게 평생 고통을 주지만 이고 가야 하는 십자가 같은 것이었을까?
디에고의 세상 자유로운 여자관계가 드러나고, 프리다가 "난 모든 세상의 여자들과 함께 그를 공유해야만 하는 걸까요? 그가 무슨 와이파이입니까?”라는 대사를 외치는데, 드립인 줄 알았던 것이 실제 대본집 대사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가 떠날까 두려워 아무 말도 못 했던 고작 22살의 프리다. 그리고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를 잃은 그녀. 아이를 잃을 때 데스티노가 나와서 마지막 별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듯한 연출 또한 굉장히 인상 깊었고, 마음 깊숙한 곳까지 와닿았다.
3. 작은 칼자국 몇 개 (Unos cuantos piquetitos)
실제 일어났던 사건에 영감을 받아, 친동생과 바람을 피운 디에고에게 상처받았던 본인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그린 그림의 제목이 바로 3장의 제목이다.
정말 이상한 것은 이 그림에서, 그림 제목 띠를 물고 있는 것이 흰색 비둘기와 검은색 비둘기 한 쌍.
피가 낭자한 그림에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있는 것은 프리다만의 블랙 유머라고 한다.
(위의 Frieda and Diego Rivera, 1931 그림에서도 비둘기가 등장한다.)
정원 배우님의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는 "아무리 큰 고통이 와도 웃음을 잃지 마"라고 한다.
고통 속에서도 웃는 것-
프리다의 그림과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공연 후반부에, 무대가 캔버스인 듯 자화상을 그리는 프리다의 독무가 있다. 이때, 빨간 장미 꽃잎처럼 보이는 색종이가 하늘에서 눈처럼 쏟아지는데, 장관이다.
열심히 독무를 추는 정원 프리다의 왼쪽 팔꿈치 부근에 색종이 두 장이 나란히 붙었는데, 그녀의 척추가 되어준 코르셋을 벗는 장면에서는 프리다가 성충이 되는 나비 같아 보여서 그랬는지, 팔꿈치에 붙어 있던 색종이 마저 꼭 나비처럼 보여서 그저 너무 예뻤다.
3막 시작하고 나서 프리다가 이런 말을 한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거. 그게 진짜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하는 거잖아."
사실 이거 내가 항상 하던 말이다. 어떤 힘든 일이 나에게 닥쳤을 때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누군가를 위로해 주기 위해 내가 이렇게 힘든 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을 버티곤 했는데 :)
모든 장면에서 위로받고, 모든 대사를 공감할 수 있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The Last Night Show에 초대된 프리다가 자신의 인생을 재연하는 형태로 극이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레플레하, 데스티노, 그리고 메모리아.
레플레하는 The Last Night Show의 진행자이다. 그리고 프리다 인생을 재연할 때는 '디에고'를 연기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자유로운 연애관을 가진 디에고는 능청능청 유혹하는 연기를 펼치는데,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대단하다.
전수미 배우님은 탭 댄스를, 리사 배우님은 스캣을 선보이시는데 두 분 모두 너무 매력적인 디에고라-
프리다를 유혹하기 위한 장면인지, 극장의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만들기 위한 장면인지 헷갈릴 정도다.
데스티노는 프리다에 삶에 드리운 죽음이다. 차갑고 이성적인 듯하나 나에겐 또 다른 프리다의 내면처럼 보였다. 힘겨운 삶을 살며 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런 측면에서 데스티노는 죽고 싶지만 누구보다 살고 싶었던 프리다의 또 다른 자아 같았다. "꺼져라 인생 따위!"를 외치며 죽음을 속삭이지만, 코르셋을 들고 나오는 것도 데스티노이기에 '죽음'보다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는 프리다의 의지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지만 또 죽고 싶지 않았던 두 자아가 컨프롱하는데, 왜 나는 데스티노가 따뜻하다고 느끼는 걸까- 이것마저도 프리다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건강한 두 발로 서 있고 의사도 된 메모리아가 "나와 함께 버텨야 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데스티노의 걱정이 더 현실적이어서 그럴 지도. (Don't get me wrong- 메모리아의 위로를 너무 사랑하고 나 또한 거기에 위로받는다.)
데스티노는 프리다의 어린 시절의 첫사랑도 연기한다.
메모리아는 끊임없이 희망의 말을 외치며 죽음(데스티노)과 대조되는, 프리다가 만들어 낸 프리다의 또 다른 자아다. 메모리아는 따뜻하고 단단하게 프리다를 지켜주고 사랑한다.
평행 우주에 살고 있는 메모리아는 아주 건강한 아이며, 외과의사가 되었다. 아픈 프리다와 딱 반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프리다는 메모리아를 통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다잡는데, 메모리아는 그런 면에서 참 듬직했다. 분명 프리다를 부르고 있는데,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나의 메모리아도 어디선가 나를 위로해 주고, 나도 나의 메모리아를 위로해 주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메모리아를 보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잖아, 괜찮게 살고 있어-' 이런 비교에서 오는 값싼 위로가 아닌
무대 위의 그녀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동감하고, 나 스스로도 사랑하고 다독일 수 있는 위로를 받았던 공연이었다.
우리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우리는 숨도 쉬고 있고
아직 사랑할 힘이 남아 있으니까.
Viva la Vi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