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때기가 얼마? 5억?
2022/09/25(일) 17:30
예스24스테이지 1관
J열
110분(인터미션 없음)
49,500원(컴백기념할인)
시니어 팀
마크 이순재
세르주 노주현
이반 백일섭
88살 제일 꼰대가 먼저 말했다.
"우정도 나를 낮춰야 오래 가"
- 연극 아트(ART)의 시니어 팀 인터뷰 중
25년이 뭐야,
50년 우정의 할배들 케미가 미쳐 돌았다.
세분이서 시트콤 찍는 느낌이었다.
현재 활동 중인 연예인 중 최연장자이자 1956년에 연극으로 데뷔 후 66년 차인 순재마크
63년에 연극으로 데뷔 후 59년 차인 일섭이반
68년 데뷔 후 54년 차인 주현세르주
이 세 분을 한 무대에 모셨다는 것 자체가
대학로 공연에 한 획을 긋는 것이 아닌가 싶어
시니어 팀의 무대는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짜인 대본에 드립으로 양념을 쳐서 진행하는 작품인 만큼, 세 분의 케미가 여실히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시니어 팀답게
셀프 디스를 포함한 나이 특화된 드립과
연륜 있는 패대기,
웃참 없이 호탕하게 웃어버리는 짬바
무대 뒤에서 대기하면서 우당탕탕 소리 내고
목 가다듬는 소리마저 귀엽게 느껴졌던 시니어 팀
말씀이 느리셔서 오디오 겹칠 때도 있었는데 그것마저 드립으로 때려버리시는 연륜
그래서 그런지 객석 반응도 장난 아니었고, 그걸 또 자연스레 즐기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마냥 웃긴 것 같지만, 딱히 가볍게 볼 수 없는 '우리의 관계'에 관한 메시지를 객석에 툭-하니 던진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하얀 캔버스 같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많은 갈등을 간직한 이 하얀 판때기마냥 참 오묘한 작품이다.
50년간 쌓아 올린 우정이 오만과 허영으로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가까운 관계 속에서 서로 판단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은 다음에 가져보련다. 그냥 너무 웃느라 시간이 홀라당 가버렸다.
건강하게 막공까지, 그리고 다음 시즌에도 시니어 팀을 뵐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이 극의 줄거리는 굉장히 단순하다.
마크, 세르주, 이반은 25년간 우정을 지켜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르주는 그림(앙뜨로와) 한 점을 구입한다. 가로 150 세로 120센티쯤 되는 하얀 캔버스.
마크를 초대한 세르주는 너무나 자랑스럽게 이 그림을 마크에게 선보인다.
마크 눈에는(물론 모든 사람의 눈에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흰색 판때기다. 그런데 이 그림을 5억이나 주고 샀다고 한다. (참고로 앙뜨로와의 가격은 물가를 반영해 매 시즌 오르는 중이다.)
마크는 이런 판때기를 5억이나 줬냐면서 불같이 화를 낸다. 세르주는 예술 작품을 판때기라고 폄하하며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비판만 늘어놓는 마크의 행동에 서운해한다.
마크는 세르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반에게 이야기한다. 마크의 이야기를 들은 이반은 세르주를 찾아간다. 세르주는 이반에게도 똑같은 그림을 보여준다. 이반은 정말 훌륭하다며 잘 샀다고 세르주에게 동의한다. 마크는 그런 이반을 보며 더 화를 낸다.
5억짜리 하얀 판때기로 시작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던 그들의 우정에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 많았던 것이다. 그 감정들이 폭발하면서 비난하고 갈등하지만 결국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셋이 함께 일 때 가장 큰 힘이 나는 '친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절대 단순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 마크, 세르주, 이반의 감정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난 논리를 가지고 싸우는 것 같지만 결국엔 얽히고설킨 감정과 내 상황이 문제였다.
마크는 관습과 전통, 현실과 자기애,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 자신보다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던 세르주가 이제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 존경이 없고 그가 더 잘 나간다고 생각하니 세르주에게 조롱과 비판을 퍼부은 것이었다. 친구들 사이에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질투와 애정이 결합된 복잡 미묘한 캐릭터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세르주에게 "네가 문제"라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세르주를 비판하며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마크가 가장 이해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던 캐릭터였지만, 극 후반부로 가면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되었다.
세르주는 의사인데, 예술에 집착한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열린 사람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듯하기도 했다. '앞서 가는 사람'의 인상을 심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주길 바라는 그런 마음,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든 내 편이어 줬으면 하는 그런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도 보인다.
이반은 관계 개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극 내내 마크와 세르주 사이에서 굉장히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데, 조금 답답해 보이고 어떤 때는 약간 모자란 것 같기도 하다. 이반은 이 하얀 판때기가 얼마나 예술적인지 잘 모르는 듯하다. 근데 그건 마크나 세르주와 다르게 이반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게 무엇이든 '세르주가 좋아하면', '너네가 좋으면'이라는 대사를 자주 한다.
누가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없다. 정답도 없다. 결론도 없다.
마크도, 세르주도, 이반의 마음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언제나 공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