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허황된 그림자
2022/12/10(토) 18:00
국립정동극장
E열
95분(인터미션 없음)
56,000원(연말감사할인)
맥베스 류정한
올리비아 안유진
뱅쿠오 정원조
맥더프 김도완
로스 박동욱
던컨 이상홍
맬컴 이찬렬
애너벨 정다예
캘린 홍철희
경호원 김수종
국립정동극장의 '연극시리즈'는 매년 한 명의 배우를 선정해서, 그 배우의 철학과 인생을 담는 작품을 제작하는 브랜드 기획공연이다. 지난해에는 송승환 배우의 <더 드레서>를 무대에 올렸다.
올해 연극 시리즈의 주인공은 이름부터 존재감을 드러내는 류정한 배우와 그가 선택한 작품 <맥베스>였다.
1열 정중앙에서 보는 류느님의 용안!
지앤하 이후 정말 오랜만에 보는 무대이기도 하고, 20년 만의 연극 무대라 한껏 기대하고 갔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예언을 들은 후부터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혀 변해가는 맥베스의 모습에서 자꾸 하이드가 보였다. (얼마나 그리웠던 류하이드였던가!)
미쳐야 할 땐 진짜 미치는 그의 연기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노래하지 않는 하이드의 느낌이라 넘 좋았던 것.... ㅜㅜ
음악이 나오고 배우님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오우 이거 뭐야 연극인데, 노래하시네! 류느님 목소리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딱 류느님만 노래하시지 않는 이런 반전!!! ㅜㅜㅜ
그래도 한없이 나약해지거나 거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폭력성을 드러내는 심리를 표현할 때 노래하지 않기 때문에 하이드 때보다 더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맥베스 레퀴엠>은 완벽한 연극이지도 뮤지컬이지도 않았다. 극 전반에 음악이 깔리고 중간중간에 노래를 부른다. 분명 노래하고 계시는데, 배우들의 노래와 목소리가 음향 효과처럼 들리는 묘한 분위기가 참 매력적이었다.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을 1920년대 스코틀랜드로 옮겨왔다. 고전극을 현대로 옮겨오는 거 정말 안 좋아하는 나지만, 전체적인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특별한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거기에 무대가 참 심플했다. 구체적으로 시대를 재현하기보다는 기둥 몇 개와 무대 뒤편의 재즈바 말고는 뭐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그 빈 공간들이 캐릭터들의 심리 변화로 더 채워지는 듯했다.
피를 하얀색 물감으로 표현한 것도 색달랐다. 빨간색이 주는 불편함을 최소화화면서, 이 흰색이 손과 얼굴에 묻었는 때는 뭔가 영혼이 빠져나간 혈색이 사라진 느낌을 주어서 점점 타락하는 인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맥베스는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 뱅쿠오와 함께 스코틀랜드 국경의 어느 재즈바에서 술을 마시던 중, 자신이 코더 영주가 되고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맥베스 글래미스 영주께 축복을
맥베스 코더 영주께 축복을
맥베스 앞으로 왕이 되실 분에게 축복을
맥베스와 뱅쿠오에게만 들리는 이 마녀의 목소리를 배우님들이 노래로 표현하는데, 그 음산하고 신비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특히, 맥베스와 올리비아 역할을 하는 배우 두 분을 제외한 모든 배우님들이 마녀의 목소리로 참여하는데, 마녀들로 노래하는 배우님들은 맥베스의 가족, 친구, 동료, 왕, 적 등(즉, 내면에 감춰진 욕망의 조각들)이라는 것이라는 것 자체가 소름 돋는 것 같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극 전체가 맥베스에게 잠재된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는- 맥베스 내면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트루먼 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맥베스가 자살할 때 배경에 퍼지는 넘버 역시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
우리의 모든 어제는 죽음으로 이르는 길
무대 위, 초초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사라져 버리는 가련한 배우
결말이 원작과는 살짝 다른데, 위 스코어 악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맥베스,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쏜다. 주위의 모든 마녀들이 다 쓰러진다"로 극이 끝난다. 스스로 파괴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좀 더 초첨을 맞추고, 맥베스가 죽음으로 욕망의 조각들이 다 사라지면서 욕망의 끝에 남은 허무함을 더욱 부각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