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저/김인순 역
#북리뷰#독서노트
모든 사람들을 위하면서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체코의 대표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후기)을 읽고 또 다른 체코 대표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려던 참이었다. 팀 선배와 한탸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 책을 추천받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먼저 읽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9)
수십 번 들어봤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이 책을 세 달 동안 천천히 두 번 읽었는데, '아 이게 이런 뜻인가?' 하다가도 '이게 뭐지' 싶은 내용이 계속해서 내 생각을 자꾸 자극했다. 책 첫 장에 쓰인 "모든 사람을 위하면서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문구가 확 와닿았다.
오만방자한 내레이터,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왜 초인이 돼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초인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끊임없이 설파한다.
이 사이비 교주 같은 차라투스트라가 내뱉는 방대한 잠언은 내 가치/기준을 차라투스트라의 사상과 대조하게 했고, 내 머릿속을 쉴 새 없이 휘저으며 무엇이 맞는지,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정확히 니체(또는 차라투스트라)의 의도에 맞게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완벽하게 이해할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이렇게 후기를 남기면서 어지러운 생각들이 어느 정도 정돈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자는 니체의 사상이 "근대 문명과 이성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했다(441)"고 말한다. "근대 문명의 발달하면서 인간의 가치 및 목표의 상실하고 노예적인 삶의 영위하는 행태로 변하면서 왜소한 대중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한다. (이 지점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도 연관되어 더 흥미로웠다.)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었을 때부터 마음 한편에 계속 머물러 있던 찝찝하고 불완전한 생각이 있었는데, 역자 해설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더없이 추악한 인간(356)"과 대화를 나눈 후, "전보다 더욱 깊이 생각에 잠겨서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쉽게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357)"다고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또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린 니체)가 비판하는 인간의 종류가 몇 가지 있다.
신을 원망하며 자만하는 인간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자라고 자처하지만 권력만 있으면 바리새인이 되는 자들(132)
자신들이 행하는 불의의 제동장치를 덕이라 부르며(124) 스스로를 연기하는 자들
동정심을 베풀어 수치심을 주는 자들
군중들에게 흔들리며, 군중을 숭배하는 '현자'라고 불리는 자들
교양 있는 척 가면을 쓰고 흉내 내는 자들
이런 인간들의 양상을 살펴보면 생각 없이 "휘둘리는 쓸모없는 인간들(65)", 의지 없이 순간을 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의 독하디 독한 잠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을 '인간'이 몰락한 후 맞을 수 있는 존재,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로, 그에게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며,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고도 불결해지지 않으려면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16)"며 그의 여정을 시작한다. 인간을 창조한 신마저 수치심으로 죽어야 할 정도의, 형편없는 인간의 세상의 살아가기 위해서는 '초인'은 꼭 필요한 개념인 것이다.
신은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 나는 그대들의 추측이 그대들의 창조적인 의지를 앞서지 않기를 바란다. (중략) 신은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 나는 그대들의 추측이 사유의 가능성을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중략) 진리를 향한 의지는 모든 것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 인간이 볼 수 있는 것,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뜻해야 한다. 그대들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하도록 하라!(111)
차라투스트라는 "인식하기 위해 살아가는 자, 언젠가는 초인의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인식하는 자를 사랑한다(18)"고 말한다. '신'이라는 존재뿐만 아니라, 기존 가치 역시 인식하고 평가하고 깨부숴야 한다고 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정신과 덕으로 지상의 뜻에 이바지하라! 그리고 만물의 가치를 새로이 정립하라! 그 때문에 그대들은 투쟁하는 자여야 한다! 그 때문에 그대들은 창조하는 자여야 한다!
육체는 앎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한다. 육체는 앎과 더불어 새롭게 시도하면서 스스로를 드높인다. 인식하는 자의 모든 충동은 성스러워지고, 드높아진 자의 영혼은 기쁨에 넘친다.
(중략)
그 누구도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수많은 길들이 있다. 그리고 수많은 건강이 있고 삶의 수많은 섬들이 있다. 인간과 인간의 지상은 무궁무진해서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
(중략)
진실로, 이 지상은 앞으로 치유의 장소여야 한다! 이 지상에 이미 새로운 향기가 감돌고 있다. 치유를 약속하는 새로운 향기가,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100)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확고부동한 교리를 설파한다. 천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지상에서 열심을 다해 지상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초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덕의 힘으로 지상에 충실하라, 베푸는 사랑과 인식으로 지상의 뜻에 이바지하라"고 간청한다. 날아가 버린 덕을 "육체와 삶으로 다시 데려오라. 그 덕이 지상에 의미를, 인간의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라(99)"고 말한다.
초인은 지상의 의미다. (중략) 형제들이여, 맹세코 지상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천상의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중략) 그들은 삶을 경멸하는 자들, 사멸해 가는 자들, 스스로 독에 중독된 자들이다. 지상은 그런 자들에게 지쳐 있다.(15)
우리는 계속 살아가기 때문에, 초인이 되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고 나아가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의식하며 발전하고 개척해 나가야 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 초인은 창조하고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특징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 '창조'는 이전 것을 파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초인이 되어야 하는 존재', 인간은 '초인으로 이어지는 다리'라고 주장하는데, 인간으로서 몰락하고 초인으로 재탄생한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말인(末人)은 다음 세계(또는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자기 극복에의 의지 없이 현실(지금 세계)에 만족해 쾌락만 탐하는 인간(20)"을 뜻한다. 말인에 속한 사람들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에게 의지하며,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고결한 자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 한다. 선한 자는 옛것을 원하고 옛것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중략) 아, 나는 최고의 희망을 잃어버린 고결한 자들을 보았다. (중략) 뻔뻔하게 덧없는 환락에 취해 살았으며, 아무런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살았다.(56)
신(또는 천국)을 맹신하며, 현재 삶을 노력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자들이라고 느껴졌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앙의 걸어 다니는 반박이며 모든 사상의 분쇄기"며, "열매 맺지 못하는 자들(159)"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자>라고 자처하지만, 오로지 권력만 있으면 바리새인이 되고도 남을 자들(132)"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신(==차라투스트라)을 발견했다고 한다.(101) 자신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고, 쉽게 가려는 행태를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처럼 말인은 노력하지 않고 '신(또는 그와 비슷한 존재)'을 찾으며, "연기를 하면서 자신을 꾸며낸다(190)". 그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는 무엇인가!>라고 한숨짓는다(190)".
....라고 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고....
그냥 내가 느낀 점은 이렇다.
동정심 또는 덕으로 베푸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인이 생긴 것 같다.
스스로 창조/노력하지 않고, 베푸는 사람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신을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을 비꼬았다고 생각한다. 병든 이기심을 가진 자는 "먹을 것이 풍성하게 넘치는 자를 굶주림의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흘끔거리고, 베푸는 자들의 식탁 주위를 항상 어슬렁거린다(97)".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심은 오늘날 모든 왜소한 인간들에게 덕이라고 불린다. (중략) 왜소한 자들에게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권리를 부여했고, 그래서 마침내 그들에게 권력까지도 내주었다(354)"라고 말한다.
니체는 종교적 가치가 타락을 보았다. 신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없어진 사회, 믿는다면서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람들과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간에게서 신이 사라졌고,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신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초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사상은 다듬어지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차별, 민족지상주의, 반사회주의 등으로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은 감안하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현대의 시선에서 봤을 때) 불편한 점 제쳐두더라도,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신성모독이 생각날 만큼, 성경 속 예수님의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부분이 꽤 많다는 것을 느꼈을 것 같다. 말투, 특정 문구, 비유 등이 상당히 비슷했는데, 거의 자신을 신격화해 설파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을 정도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나에게 거슬리는 부분이 당연히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나 또한 인간의 한 명으로서 인간이 가진(인간이기에 보이는) 추한 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을뿐더러, 인간의 민낯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위선적인 인간상과 만사를 남김없이 까발리고 싶었던 니체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고민했고, 열성껏 사고했고, 그 어떤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성경을 매우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대가>, <보복>. <응징>, <정의의 복수> 같은 말들에 염증을 느끼기를. <착한 행동은 이기심이 없는 행동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기를.(125)
아, 그래 다정한 바보 차라투스트라여, 그대 신뢰에 넘치는 자여! 하지만 그대는 언제나 그랬다. 그대는 언제나 모든 무시무시한 것에 친밀하게 다가갔다. 그대는 모든 괴물들을 어루만지고 했다.(204)
그러했기에 그가 제시한 이런 고찰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더 많이 회자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