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좋은 오마카세
생일을 맞아, 사촌 언니와 오랜만에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녀왔다. 사실 이름도 모른 채 갔는데, 맛있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후기를 쓰면서 다른 분들의 후기도 읽어 봤는데, 가성비 좋은 오마카세라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맛있다', '미쳤다', '괜찮았다'의 맛평가만 할 줄 아는 수준이라 후기랄 것도 없지만, 미래를 나를 위한 기록으로 남겨둔다.
귀엽지만 뭔가 잔인한 이름의 '냠냠물고기'는 3호점까지 있다. 우리가 이날 방문한 곳은 2호점(2탄)으로, 오마카세 예약제로만 운영한다. 이곳은 3호선 경찰병원역 코앞에 있으며, 날이 좋으면 분위기가 매우 좋을 루프탑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경찰병원역 4번 출구에서 50m 정도밖에 안 갔는데, 이 근처라며 언니의 걸음이 멈췄다. 1층엔 노무법인이 있었고, 식당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완전 사무실 건물이었다. (거리뷰를 보니 건물 꼭대기에 물고기가 그려진 황금색 간판이 있긴 한데....)
'냠냠물고기 2탄'은 그런 건물 6층에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며 고급스러워진다. 뭔가 특별한 건 없는데, 심플하지만 따뜻한 느낌이 나는 입구였다.
내부엔 4인 테이블 6개가 있었고, 벽은 Turquoise 색이었지만 사실 막 멋있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스마마셍.. 사실 벽지 색이 뭐가 중요한가)
메뉴는 한 가지만 있으니, 우리가 골라야 할 건 오로지 술이었다. '키쿠마사무네 쥰마이 타루사케(720ml, 15%)'라는 사케를 시켰다. 식당의 설명에 따르면 "카라구치 혼죠조를 요시노 삼나무 술통에 담아 향기가 가장 좋을 무렵 꺼내어 병에 담은 사케"며, "요시노 삼나무의 향과 빈틈없는 목 넘김이 장점인 사케"라고 한다.
사케를 주문하니, 고양이가 박혀있는 카와이한 사케잔이 나왔다.
디저트까지 총 11개의 코스로 나왔는데 각 코스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국엔 밥을 덜어내고 먹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의 코스였다.
아래 설명은 코스가 나온 순서대로, 식당에서 먹으라는 순서대로 적었다.
홍합죽- 아주 맛있었다. 평소에 접하지 않았던 죽이라 색달랐는데, 홍합맛이 잘 느껴졌고 속을 뜨끈하게 데우는 애피타이저의 역할에 아주 잘 맞았다.
(푸딩 뭐라고 하셨는데) 이름 모름... - '관자+연어알+커스터드 크림(ft. 와사비)'이었는데, 상상이 가지 않는 맛이지만 누가 이 셋을 조합할 생각을 했는지 꽤 맛있었다. 커스터드 크림의 고소한 맛이 상당히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모찌리도후- 쌀과자(?) 데코가 고소하니 괜찮았다. 모찌리도후가 무(無) 맛인 것 같아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첫 코스의 입가심으로는 괜찮았다.
간이 세지 않은 순서로 먹어야 한다고 하셨던 2번 접시엔 광어에 캐비어, 방어, 무늬오징어, 도미가 있었고, 우니와 소금이 곁들여 나왔다.
원래 우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곳 우니 역시 조금 비린 듯해서 살짝 맛만 보고 우니는 먹지 않았다.
생선은 꽤 괜찮았다. 무엇보다.. 역시 겨울엔 방어다. 방어가 미쳤다. 방어회만 먹으러 조만간 어디론가 가야겠다..
이번 코스엔 고등어+초생강, 홍민어에 된장, 청어 마끼, 연어와 크랜베리?소스를 얹은 삼치가 나왔다.
고등어가 빨리 비려지기 때문에 고등어를 먼저 먹으라고 하셨는데, 자칭 고등어회 전문가인 사촌 언니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 이렇게 맛있는 고등어회를 첨 먹어봤다고 했다. 모든 생선이 굉장히 쫄깃했다.
근데 이 가격에 이런 컨셉이라면.. 뭐 생선의 질은 당연히 기본이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번엔 전복 튀김, 전복 내장, 밥+김과 시소 마티니가 나왔다.
일단 튀김은 따뜻해야 하니, 튀김 먼저 먹었는데-뭐든 튀긴 건 맛있다지만, 이건 진짜 맛있었다. 그리고는 전복 내장에 밥을 쓱싹한 후, 와사비를 조금 올려 김에 싸 먹었다.
시소[しそ](일본 깻잎, 차조기)로 만든 마티니는 이때 먹진 않았지만, 입가심으로 좋았다. 코스 중간중간에 생선의 비린 맛을 없애주는 이런 입가심 메뉴(?)가 나와서 너무 좋았다.
서서히 국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으셨는지 물회가 나왔다.
방어가 잔뜩 들어간 새콤달콤 물회였는데, 사실 먹었던 코스 메뉴 중에 제일 별로였다. 그래도 뭔가 떠먹을 빨간 국물이 있다는 것과 야채가 많은 건 좋았다.
다음 코스로 고등어봉초밥이 나왔는데, 이 메뉴 역시 기가 막혔다. 김에 싸서 와사비 살짝 얹고 초생강과 함께 먹었다.
그리고 이쯤부터는 (이제 반쯤 왔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불러와서 2차 생각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뭐 먹은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이번 코스엔 참지 대뱃살, 중뱃살, 배꼽살과 단새우가 나왔다.
배가 불러도 맛있는 게 진짜 맛있는 것이지 않는가. 역시 참치는 진리다...
새우 알러지가 있어서 새우는 언니에게 양보해서 맛은 모르지만, 맛있었다고 한다.
미니 카이센동과 우니, 매실 절임이 나왔다. 밥을 쓱싹 비빈 후, 우니를 조금 얹어 김에 싸 먹어 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배가 너무 불러서 밥을 꽤 많이 덜어내야만 했다. 우니엔 손도 대지 않았..
매실 절임은 상상하는 딱 그 맛이다. 매실의 짜릿한 맛.. 매실 절임은 이때 먹지 않고 다음 코스를 먹은 후에 먹었는데, 완벽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생선 맛이 완전 싹 가시게 해 주는 맛이었다. 남겨뒀다가 입 비릴 때 먹는 것을 추천한다.
앗 생선 이름을 적지 않았다. 배가 불러서 뇌도 멈춰버린 상태였나 보다.
역시 새우는 언니에게 양보하고 우니는 상당히 덜어낸 후, 캐비어랑 이름 모를 생선과 김만 먹었는데도 맛있었다. 배가 불러도 포기할 수 없는 날 것..
마지막으로 장어솥밥+장국, 튀김 2종이 등장했다.
비록 장어만 건져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장어솥밥을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에겐 약간 짜서, 손이 그렇게 많이 가진 않았다. 같이 나온 장국이 더 맛있었다.
튀김으로는 단호박 튀김과 오징어 튀김이 나왔는데, 오징어도 맛있었지만 단호박이 정말 맛있었다.
디저트로는 시소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막자사발에 모래 뭉쳐놓은 것처럼 생겼지만, 혀에 닿으니 스푼이 달라붙어서 앞니로 긁어먹어야 했다.
좀 녹으니 단맛이 적당히 돌면서 맛있었고, 물고기 맛이 가득했던 입을 깔끔하게 씻어주어서 코스를 마무리하는 디저트로 정말 좋았다. 이래서 단짠
나가기 전에 지붕을 잠깐 열어 주셔서 야경을 볼 수 있었는데 (추워서 5초 만에 닫긴 했지만) 아주 잠깐 맛본 바깥공기가 너무 상쾌했다.
첫 잔부터 세워뒀던 2차 계획을 철저하게 무산시킬 만큼, 아주아주 배부르게 잘 먹었다.
결론.
음식 맛은 괜찮았지만, 생각한 것만큼 고급진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평소 음식을 자극적으로 먹지 않는 내 입엔 조금 짜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양한 생선 요리를 적당한 가격에 맛보고 싶은데, 분위기를 조금 더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우리가 갔을 때, 우리 테이블 제외 모두 소주를 드시고 계셨으니.. 여차하면 근처 가락시장에서 좋아하는 생선을 원없이 먹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