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알고리즘은 제안하지만 우리는 평가한다. 몇 없는 독자분들껜 늘 고맙지만 그들의 입맛에 맞는 평가를 할 생각은 없다. '알고리뷰'의 첫 번째 주제는 화제작인 '오펜하이머'이며, 스포일러는 없다. 이번 리뷰에선 저명한 과학자들의 생애에 관한 설명, 구조적 해석 등은 최대한 배제한 채 철저히 개인의 감상에 대해 논할 예정이다.
필자는 친절하지 않은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놀란의 영화 대부분은 관객이 의문점을 품은 채 퇴장하게끔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런 놀란의 팬이다. '범죄도시'처럼 머리를 비운 채 감상할 수 있으며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와도 흐름상 문제가 없는 영화들도 좋지만, 이왕 비싼 티켓값을 지불했다면 남는 게 단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감상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유와 무조건적 수용의 균형이 잘 잡혀있을 때 탁월한 작품이라고 평가 내리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크나이트'는 걸작이다. 배트맨이 조커와의 대립에서 영웅적인 면모를 통해 쾌감을 선사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책임, 도덕적 딜레마와 선택, 성장과 타락 등 다양한 생각거리를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크나이트에 내재된 메시지의 수준은 적어도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은 골머리를 앓지 않을 정도이며, 크레딧이 올라온 뒤 동행자와 각종 시퀀스에 대해 토론하기에는 차고 넘친다. 연출이나 진행 방식 또한 내용 파악을 방해하지 않는다.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는 소재 자체가 다른 차원에 있어 길을 잃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흥미롭게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갈 수 있다.
반면, 버섯구름을 바라보는 중절모 사나이의 삶과 내면을 조명하는 방식은 마치 마라톤과 같다. 길기도 길지만 중간에 쉴 수가 없다.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을 확인하고는 '감독이 여유 있는 서사 진행을 의도했겠구나'라고 감히 예측했는데, 놀란에게는 그것도 부족했던 것 같다. 상황 혹은 심리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임팩트 있는 대사가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대부분이 별다른 전조가 없어 긴장을 놓칠 수가 없다. 사악한 러닝타임이 아니더라도 피곤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속도로 핵은 개발된다.
전쟁이라는 역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기에 필연적으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야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오펜하이머는 1,000화가 넘어가는 원피스를 최신 에피소드로 처음 접한 독자의 심정을 짐작케 한다. 스쳐가는 분량이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많으니 유튜브에서 '오펜하이머 감상 전에 보면 좋은 영상' 등을 통해 그들과 익숙해진 상태라면 훨씬 쾌적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이 핵 2방을 맞고 백기를 든 사실은 특히 광복절을 공휴일로 삼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도 하고, 감독 또한 핵 개발 과정에서 오는 서스펜스를 영화의 핵심으로 여기진 않은 듯하다. 오히려 명확하게 묘사된 주요 인물 간의 갈등이 극을 이끌고 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는 단지 각 인물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스트레스를 풀고자 오펜하이머를 감상한다면 되려 스트레스가 쌓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탁월한 심리 묘사에 있다. 영화를 보면서 핵폭발 장면보다 오히려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전달 방식에 더욱 놀랐던 기억이 있다. 딱 '오펜하이머는 어떻다'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도록 인물이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그를 통해서 생각해 볼 점도 많다. 영웅적인 서사, 권선징악과 같은 틀에 맞춰진 영화가 절대 아니며, 옳고 그름 보다는 인물들의 고뇌와 선택에 대한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극이 마무리로 치닫으면서 오펜하이머가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가 맞춰지기도 하는데, 꽤나 임팩트 있는 엔딩 씬이니 기대해도 좋다.
필자는 평소에 영화 감상에 대한 깊이가 깊지 않다. 영화를 다 본 뒤에도 '무려 놀란 영화인데 감탄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가?'라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리고 집에 온 뒤에 이동진의 오펜하이머 리뷰부터 찾아봤고, 그제야 이 영화가 훌륭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그 피로감을 돈을 주고 다시 느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이건 영화가 훌륭한 건지, 아니면 이동진의 분석 및 감상이 훌륭한 건지 헷갈렸다. 솔직한 말로 오펜하이머는 이동진의 리뷰 영상을 재밌게 보기 위한 3시간짜리 프리퀄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감상 역량이 부족한 것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한테 만큼은 영화 자체만으로 훌륭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건 훌륭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지만, 여러 번 봐야 좋은 영화라면 그게 평양냉면이랑 다를게 뭔가.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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