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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 없는 글쓰기. 근데 이제 의미를 곁들인

by ALGORITHM

내 노트북에는 대학생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무슨 수업을 들었는지도 모르게 난잡했던 1학년 시기의 파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2학년부터 수업 때 정리한 파일들이 파편적으로 남아 있는데, 가끔 들어가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글을 과제랍시고 냈는지 훑어보는 재미가 있다. 그 시간은 길지 않다. 아니 길지 못하다. 5분만 봐도 도저히 낯뜨거워서 봐줄 수가 없다. 이런 글을 과제로 제출해놓고 A에 플러스가 붙지 않았다며 칭얼대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 재빨리 유튜브를 튼다. 그곳은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까.

불과 5-6년 전도 이렇게 부끄러운데, 10년, 15년 전은 어떠했으랴. 아마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지경이었으리라. 들추고 싶지 않은 일련의 검은 역사가 이곳 저곳에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때를 그리워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 때와 다르게 좀 점잖이 살아보겠다는 바람도, 그 때 미리 알았으면 좋을 것들에 대한 회한도 아니다. 엄청난 보정을 받은 추억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순간들에게 자연히 매달려 있는 꼬리 같다.


무지의 세계로


내 코와 입은 오십이 되기 전에 떨어져 나갈 게다

여름 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잠자코 있다가도,

한로만 지나면 냉기와 건기가 바이러스를 발생시킬 수 있으니 체내에서는 항시 경계태세를 강화하라며

입의 수분을 끌어다가 코에서 점액을 내뿜는다.

온 종일 찌륵거리며 휴지심 구멍을 채웠다 비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잔뜩 부었던 비중격에 푸하고 숨 쉴 틈이 생기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무지의 세계로 돌아간다.

부끄러울 양심 없이 온종일을 나달거리면서 탐욕하고 발기하기를 수십 번.

줄 서서 나를 기다리는 비극의 소네트들을 볼 새도 없이 누군가의 이름에 웃고, 표정에 웃고, 말에 웃던.

그 세계로 다시 빠져든다.

어느새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의 앵글이 되어. 후회하다 반추하기를 반복한다.

그 무지의 세계로 돌아가면 또 다시 지나쳐야 할 그 경망함에도 난 머리 속을 깨끗이 지우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 황홀경이 끝나면 다시 코를 찌륵거린다. 잔뜩 부풀어진 비중격 틈을 밥 냄새가 비집고 들어온다.

오늘의 나는 문명의 이기에 감사하며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세계를 갈망하고 갈구하고 원하다가

미지의 세계로 나가며 무지를 지워내겠다고 고독히 다짐한다.

22.11.2


​​

7년 전의 나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움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미워한다.


​​

나를 눈물 고이게 하는 순간들과

절연하고자 할 때에

나에 대한 연민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건 너야 그건 너 자신이야 하고

내 속에 땅거미를 지운다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며 아스팔트에 균열만 찾다가

멍하니 서있었다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다라고

비웃는 미래의 나

그리고 그 옆에 지금의 나

과거의 나는 온 데 간 데 없이

웃음에 신나있다

15.9.29


​​

과거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15년의 나는 과거의 나를 절연하거나, 연민하거나, 비웃는다.


그리고 7년 후의 나는 후회하고 반추하다 지워내겠다고 다짐한다. 아직도 완전히 화해하지는 못한 듯 하지만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는 적어 놓은 글자 몇개로 오락가락한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판결을 기다리는 용의자처럼 우두커니 지금의 나의 손만 보고 있다.

나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앞으론 어떻게 달라질까.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될까. 29년의 나는 어떻게 나를 기억할까.

쓰기의 매력은 여기 있다. 기억과 변화를 조우할 수 있는 것. 아무 의미 없는 끄적임이 그냥 흘려보냈을 내 변화를 포착하고 있으니, 조금의 부끄러움과 충분히 교환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15년의 화자와, 22년의 화자, 그리고 두 화자가 그리는 과거의 나를 모두 안아주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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