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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문학선 1> 구매기

by ALGORITHM

최근 서점에 다녀왔다. 기교에만 충실하여 겉멋뿐인 글은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 부끄러울 만큼 문장력에서 한계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 소설 전집>이 초보자에게 적합하다는 조력자의 조언을 들었고, 그 책을 읽은 뒤엔 멋있는 글이 자동으로 술술 써질 것만 같은 기대를 한껏 품은 채 집 근처 중고 서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초심자가 많았는지 매장엔 <이상 소설 전집>이 없었고, 아쉬워하던 찰나, <한국단편문학선 1>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상을 비롯한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된 만큼 다양한 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사로잡혔고, ‘그 책은 별로야’라는 조언은 무시한 채 계산대로 향했다.


애석하게도 <한국단편문학선 1>은 현재 어떤 라면이 담긴 냄비를 받들게 될지 궁금해하는 4,700원짜리 냄비받침이 될 위기에 놓여있다. 책이 너무 무거워 귀갓길이 힘들었는지, 구매하고 나서야 누워서 엄지로 짧은 영상 토막을 넘기는 행위의 가치를 깨닫게 된 탓이다. 그렇게 그날은 운동과 독서 중 하나만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고, 정신보단 육체의 건강을 선택하게 된 뒤로 일주일 넘게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어쩌면 책을 사놓고 읽지 않을 때의 짜릿함을 느끼기 위해 책을 사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해 우스웠다. 그래서 오늘의 글 내용은 독후감이 아닌 서점 방문기 혹은 도서 구매 후기가 될 예정이다.


서점에 방문하게 된 건 꼴에 낭만은 챙기겠다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책을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책값의 5분의 1 가량을 차지하는 배송비가 아깝기도 했다. 혹독한 날씨를 뚫고 도착한 서점은 남극 같았다. 편의점 알바 당시 냉장고 뒤쪽 공간에서 음료를 채워 넣던 시절의 기억이 날 정도의 냉기였다. 나무의 희생물들이 한가득 쌓여 있고, 한여름에도 머리가 띵할 정도로 에어컨을 틀어대는 이곳이 진정 환경오염의 주범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 코너로 이동하던 중 각종 경제 관련 도서를 마주하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한 때는 예술혼으로 가득 찬 사람일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여러 모로 아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는 타협을 한 탓이다. 창작에 몰두할 상황이 아니라면 돈이라도 많이 버는 게 맞다는 계산이 든 이후론 적게 일하고 많이 벌 방법만 궁리했던 것 같다. 나태한 고뇌의 결론은 ‘그딴 거 없다’였지만. 적어도 내 글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서점에 왔으며 굴릴 돈도 딱히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사히 유혹을 뿌리치고 소설 코너로 이동할 수 있었다.


중고 서점임에도 뭔 놈의 책이 이리 많은 지, 독서 초보자를 위해 각 책마다 난이도를 표시해 주는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미 알다시피 가장 초보스러운 제목의 <한국단편문학선 1>을 골랐다. 조지 오웰이나 단테 등 슈퍼스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기도 했으나, 그것을 제대로 느끼려면 어느 정도 독서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그럭저럭 괜찮은 이유를 대고는 나중으로 미뤘다. 저렴한 중고 서적들인 만큼 여러 권을 살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행하고자 도달한 곳에서도 나는 망설일 뿐이었다.


서점엔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이 찬찬히 둘러보며 어떤 견문을 쌓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당연한 듯 들르는 곳에 나는 이토록 큰 맘을 먹고 왔다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앞으로 서점에 일상적으로 방문하는 습관을 들이는 데에 발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기특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푹신한 냄비 받침을 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글을 쓰다 보니 독후감, 서점 방문기도 아닌 자아성찰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부터 글을 쓰고자 앉아있다 보면 이런 식으로 귀결되곤 한다. 독자들은 한 개인의 사소한 후회 따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며, 나 또한 이 글쓰기 공간이 반성문 모음집이 되는 상황이 반갑지 않다. 그럼에도 징징대는 이유는 이번에 내가 미룬 것은 독서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지금 자신과의 약속을 등지고는 월요일에 올라왔어야 하는 글을 화요일에 쫓기듯이 쓰고 있다. 이제는 별 시덥잖은 이유로 타협을 시도하는 나 자신을 그만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에 앓는 소리를 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한동안은 은근한 감동만을 전할 수 있도록 바삐 살아갈 것이며, 일단은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한국단편문학선 1 후기’로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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