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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가 내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by ALGORITHM


0에게 세계문학전집을 읽어보라고 추천해 준 건 나였다. 모두 세어보진 않았지만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만 80권 정도 가지고 있는 나는 그중에서 대략 65권 정도 읽었다. 읽는 재미도 재미지만 마치는 재미, 모으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민음사는 독자의 이런 재미를 정확히 알고 있다. 표지를 형형색색 예쁘게 디자인하고, 늠름한 작가의 얼굴을 제목 위에 삽입해두었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고개만 돌리면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일렬도 도열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활자는 느낌으로 확장된다. 분명히 안에 자리 잡고 만다. 고전을 읽어서야 어딘가 익숙한 상황이 나타나겠냐 마는, 종이 안에 인간들은 내 안에 들어온다. 읽기 전의 나와 읽고 난 후의 나는 다르기도 하다. 남들이 안 하는 걸 한다는 허영심과, 멋진 표지는 덤. 내겐 기쁨이었다.


‘난 책 읽는 사람입니다.’는 내게 자랑 같은 수식어였다. 순수한 호기심에 시작한 독서였지만 어느새 얄팍한 스펙으로 사용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면접에서 나는 책 몇 권 읽은 걸 가지고 인간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뻔뻔하게 어필한다. 요즘 청년에게서 볼 수 없는 구태의연함에 궁금증이 생겼을 터. 바로 검증이 들어온다.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세 가지만 재미있게 소개해 줄 수 있겠느냐?’


‘재미있게 읽은 책’은 나의 취향을 묻는 것인데, ‘재미있게 소개’하라는 건 내가 왜 재밌었는지 설득해 보라는 뜻이렸다. 3이라는 숫자에 당황한 나는 할 말이 많은 세 권을 골라 나열한다. 이렇게 대답한 게 솔직히 나빠 보이진 않았다. 반응도 괜찮았다. 그런데 나는 불쑥 튀어나오는 내 얄팍함이 싫다. 그리고 다시는 책 읽는 걸 자랑으로 삼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쏟은 시간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걸 잘 알았다.


‘알맹이만 남아. 쭉정인 가고.’

읽기를 자랑하지 않고 싶어진 나는 다시 읽기를 생각한다. 잠깐 쳐다보기 싫었던 흑백의 얼굴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종이는 곱씹어야 소화가 된다. 대충 씹어 넘기면 항문만 찢어 놓을 뿐 아무런 영양분도 주지 못한다. 한국 단편 문학선 1은 별로라고 말했던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함부로 떠들었던 입이 주책이다 싶다. 뭘 읽든 곱씹으시라. 이게 책 몇 권 읽고 설쳐댄 내가 0에게 줄 수 있는 오답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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