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요즘 부츠컷, 혹은 플레어드 핏으로 불리는 형태의 하의에 빠져 있다. 예전에는 밑단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통이 주는 인상은 엘비스 프레슬리같이 누가 봐도 복고라는 단어를 연상케 하는 느낌이었는데, 자칫 촌스러워지기 십상인 옷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며 세월의 힘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요즘 나오는 부츠컷 의류들은 예전처럼 극단적으로 허벅지가 슬림하면서 밑단이 넓기보다는 '세미 플레어'로 불릴 만큼 적당한 느낌이다.
부츠컷은 주로 여성들이 찾는 핏인 만큼 슬림한 체형의 남자가 입었을 때 특유의 중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으며, 몇 년 전부터 여러 브랜드들이 앞다퉈 컬렉션에서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 다만 체형을 많이 타 잘 어울리기가 어렵고, 조합할 수 있는 옷이 비교적 한정적인 탓에 부츠컷의 부흥을 다시 일으키기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사실 유행이 되기 힘들다는 점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알만한 사람들은 발 빠르게 수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쉽게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부츠컷의 멋은 아무래도 웨스턴 룩 아이템들과 함께일 때 극대화 되는 것 같다. 서부 시대를 연상케 하는 가죽 재킷, 뾰족한 구두, 포인트가 되는 벨트, 키링, 체인 등을 통해 연출할 수 있는데, 필자는 막상 그런 것들이 잘 없다. 심지어는 부츠 한 켤레도 신발장에 두지 않았다. 이는 그간 은은하면서도 적당히 돋보이는 패션 기조를 추구해 왔기 때문인데, 나로서는 휘황찬란한 웨스턴 룩으로의 전환은 너무도 급진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무언가를 살 때 쓸데없이 까다로운 성격 탓에 적당한 아이템을 구매하는 데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고, 그 결과 겨우겨우 구매한 3벌가량의 부츠컷 진마저 기존 스타일의 옷들과 믹스매치되기 일쑤였다.
패션도 자기표현의 수단인 만큼 입는 이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법이고, 은은하게 돋보이고 싶은 것은 나의 겉치장뿐만은 아닐 것이다. 외부의 시선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신경 쓰는 나는 어느 분야에서든 너무 튀기는 싫지만, 중간만 가는 것이 좀 더 싫었다. 너무 눈에 띄면 필연적으로 비난이 따라옴을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정에 대한 갈망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꽤나 과감한 의류인 부츠컷 바지를 고르면서도 불특정 인물로부터의 험담을 걱정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무난한 스타일의 부츠컷만을 구매하게 되었다. 스타일의 전환은 너무나 나답게도 보수적이고 굼뜨게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부츠컷이 자기 피부마냥 어울리는, 어딜 가든 돋보이는 사람이 현재 내가 바라는 이상향은 아닐까? 부츠도 없이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할 부츠컷 진을 억지로 한 벌씩 사는 것은 사실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과감한 스타일을 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온갖 고민 끝에 구매를 보류하고, 적당한 나팔바지 몇 벌로 단번에 멋있어질 것이라 착각하던 모습이 그간 삶을 대했던 방식을 대변하는 듯하다. 진정 웨스턴 스타일을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해 갈 길은 너무나도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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