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무려 성인이 되고 난 뒤 세 번째 경주 방문이다. 수학여행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 가봤을 경주는 필자가 국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 중 하나인데, 큰 기대를 품은 채 여행하는 것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주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장소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는 답변이 바로 나오지는 않지만, 한 번쯤 가보면 좋을 법한 스팟은 사방에 있다. 꼭 가봐야 할 장소가 명확하지 않기에 경주에서는 급하게 움직일 필요 없이 팔자 좋게 돌아다닐 수 있다. 은근한 설렘을 품은 채 방문한다면 꽤나 만족스러울 여행지이다.
경주에서는 저명한 역사 유적지, 높은 난이도의 테마파크, 바다, 전통 가옥 등의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각각의 관광 코스가 밸런스가 잡혀있어 어느 곳을 선택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가야 할 곳을 한 곳만 추천해야 한다면 국내 최상급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동궁과 월지' 혹은 '월정교'를 고르겠다. 사실 월정교는 가보지 않았는데,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동궁과 월지'와 느낌이 다소 유사했고, 개인적으로는 둘 다 가볼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이번 방문은 문화재나 자연경관보다는 휴식을 우선으로 했다. 여자친구가 황리단길 근처의 좋은 방을 예약해 준 탓에 꽤나 호화로운 1박을 보낼 수 있었다. 숙소에 큰돈을 지출하는 것이 마냥 달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터미널 인근 호텔(대개 이름만 그렇다)에서 묵었을 때와 비교하니 돈이 참 좋구나 싶었다. 통창 오션뷰, 풀빌라 등 때깔 좋은 숙소가 유행하게 된 것은 인스타그램 때문이며 그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딱히 SNS를 하지 않음에도 심미적으로 뛰어난 곳에서 묵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했고, 남들에게 보일 용도가 아니더라도 비싼 것이 대개 만족스럽다는 것을 체감했다.
황리단길 근처 대릉원에 가면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저런 곳에 묻힐 수 있을지 감도 안 잡히는 규모의 무덤이 군집해 있다. 어렸을 땐 큰 무덤을 봐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한 사람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노동력이 투입 됐을 것을 생각하니 은근히 부러웠다. 동시에 미래의 나의 무덤은 어떤 형태가 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할지 따위를 궁금해하면서도 만약 내가 신라 시대에 무덤을 쌓는 인력이었다면 과연 고인을 기리는 슬픔 마음으로 노동에 임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기도 했다. 대릉원 무덤들의 녹색 곡선 실루엣은 보기에 꽤나 아름다운데, 누군가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에서 그것을 즐기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같은 장소를 저녁에 다시 지나가보니 무덤 앞에서 음악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다. 초청 가수로 박완규 씨가 등장해 둥근 무덤을 배경으로 샤우팅을 질러대는 것을 보니 내가 별 걱정을 다 했구나 싶었다.
경주의 꽤 치명적인 단점으로는 음식이 있다. 음식이 전반적으로 맛이 별로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경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음식이 딱히 없다. 경주를 대표하는 음식은 대개 디저트류로 십원빵, 찰보리빵, 황남빵 등이 있는데, 시내에서는 열 걸음에 가게 하나를 만날 수 있을 정도니 경주에서 저것들을 먹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외에 황리단길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대개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으니 식도락 여행으로 경주에 방문한다면 만류하고 싶다. 여담으로 십원빵은 꽤 맛있었다.
이튿날에는 경주월드에 방문했다. 경주까지 가서 무슨 놀이공원을 가나 싶겠지만 경주월드의 어트랙션은 무척이나 스릴 넘치며,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원하는 어트랙션을 모두 누릴 수 있다. 특히 90도 수직낙하 코스가 있는 롤러코스터 '드라켄'은 체감상 에버랜드의 T익스프레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은 짜릿함을 선사한다. 대기 줄에는 '피터'가 용을 무찌르고 '절대반지'를 획득한다는 내용의 북유럽 신화 기반의 세계관이 설명되어 있는데, '경주월드는 놀이기구의 재미에 집중하기로 했구나' 싶은 대목이었다. 지역 맛집마냥 모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음을 증명하는 캡쳐 화면들도 붙어 있어 다소 짜치는데, 어트랙션 자체가 재밌어서 용서가 되는 편이다.
레일에 매달려서 가는 롤러코스터 '파에톤'은 작정한 듯이 상하좌우로 방향을 비틀었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한동안 카페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고, 두 번은 타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다. 워터라이드 유형의 '섬머린스플래쉬'는 엄청난 양의 물이 튀겨 우의를 필히 착용하고 탑승해야 했다. 그거 한 번 타기 위해 2,500원짜리 우의를 구매하는 것이 아까워 모르는 사람에게 "그 우비 버릴 거면 저 주세요"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오가 있으니 그냥 구매했다. 다행히 '섬머린스플래쉬'의 줄이 적어 2번 탑승할 수 있었고, 나름의 뽕을 뽑게 되었다. 개중에는 우의를 착용하지 않고 탑승하는 상남자들도 간혹 있더라.
여정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오니 몇 시간 전엔 내 몸뚱이가 롤러코스터에 있었다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여행에서 가장 힘든 점은 아무래도 여행과 현실의 괴리감이 너무 크다는 점일 것이다. 나의 일상도 여행처럼 재밌고 새로울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아직까진 말처럼 쉽지가 않다. 어쩌면 그래서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 경주 여행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젠 경주를 뒤로 하고 경주에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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