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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영웅

by ALGORITHM
브루벨. 앉아있는 악마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라곤 다른 사람의 희망을 파괴하는 일뿐인 걸까? 살면서 행동하기 시작한 이래로, 운명은 나에게 늘 다른 이들의 드라마를 결말짓도록 해 온 것 같아. 마치 내가 없으면 누구도 죽거나 절망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제5막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야. 어쩔 수 없이 사형 집행인이나 배반자 같은 불행한 역할을 떠맡지. 대체 운명의 목적이 뭘까……. 나에게 소시민의 비극이나 가족소설의 작가라도 되게 하려는 걸까? 아니면 <독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이야기 조달 상인들의 동업자라도 되라는 걸까? 그걸 어떻게 알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의 처음에는 알렉산드르 대왕이나 바이런 경처럼 죽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그 대신에 내내 유명무실한 상담자가 되어 살아가느냔 말이다!

미하일 레르몬토프. 우리 시대의 영웅 중에서


아무튼 지붕 까는 사람은 늘 더 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니 말이다.

장 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인생은 결코 실험이 아니다. 실행이다

이상 십이월 십이 일 중에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요.”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서머셋 몸. 면도날 중에서


양심이 있는 자는, 자신의 오류를 의식한다면, 괴로워하겠죠. 이게 그에겐 벌입니다, 징역과는 별개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중에서




지금 이 문장들의 나열은 결코 나의 다독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다. 추분이 다가오니 입술이 마르기 시작했다. 높아지는 하늘과 기분 좋은 산실 바람은 푸석한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잘 어울린다. 가을이 되자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밑줄들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새로운 활자를 읽는 설렘만큼이나, 새롭게 읽히는 기쁨도 벅찬 것이다.


처음엔 이 문장들이 좋았다. 살면서 이 책들을 읽지 않았으면 평생 들어보지도 못했을 말들이니 더욱 무겁게 가슴 한 켠에 자리 잡았다. 좋아하면 모방하고 싶다고 했던가. 내 목표는 이들의 문장처럼 누군가의 삶에서 중요하게 인용되는 단 한 문장이라도 써보는 것이다. 정말이다. 저 글자들 외에도 많은 글들이 내 머리에 들어왔다가 잊히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마치 음식을 먹는 것 같다. 당장은 살이 찌는 것 같지만, 어느새 변으로 모두 나가고 음식을 맛보던 기억만 남아버리는 희미함.


한 주에 한 번 분량 제한 없는 문장들을 아무렇게나 써 내려가면서 부끄럽기도 많이 부끄러웠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써놓은 글들을 재가공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반성들 끝에 글들이 쌓여간다. 어떤 얄팍함들은 제쳐두고, 써놓은 글들을 차분히 읽어보면 내가 보인다. 그때의 내가.


내일부터 몇 가지 즐거운 일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잠깐이지만 소풍을 기다리는 설렘을 떠오르게 한다. 그 행복들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고독과 고뇌의 시간. 권태와 질투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생이 좋다. 내 뜻과 달리 흘러온 삶은 분명히 나를 변화시켰다. 밝던 내 자아는 침잠했지만.


오락가락하는 삶에서 나를 찾아준 건 허구였다. 누군가 떠오르는 상상을 옮겨놓은 백 년도 넘은 퀴퀴한 활자들. 그리고 요즘 그 문장들이 마렵다. 레르몬토프가 내 나이쯤 써놓고 간 소설을 읽고 난 나의 솔직한 후기를 마지막으로 알 수 없이 써 내려간 이 사담을 마치고자 한다. 이 안에 나를 봐주시라.

‘삶과 운명에 대해, 죽음으로 가는 길에 대해. 발랄하게, 때로는 시니컬하게. 불안에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며, 길들여지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정열적이면서도 악독한. 냉소적이면서도 귀가 부드러운 한 청년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재미있는 여행.

나와 비슷한 인간을 글 속에서 만났을 때, 반갑다가도, 그의 재능이 부러워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다가도, 어느새 머릿속에 그의 말들을 주워 담는 얄팍함에 웃기도 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며 스스로를 칭송하는 나르시시스트이자, 스스로 얻어내고자 하는 투쟁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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