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애인은 동물을 사랑한다. 그녀는 산책을 즐기지는 않지만 집 밖을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데, 본인이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기 때문에 밖에서만 강아지나 길고양이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외출을 하다 보면 아이나 강아지를 꼭 한 번은 마주치기 마련인데, 그에 따라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이 연애 초기에는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는 자신을 '사나이'라 일컫는 나에게는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나의 자식이나 반려동물이라면 큰 감흥을 느낄 것도 같지만, 나와 유대감이 전혀 없는 귀여움이 주는 시각적 만족감은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내가 축구를 보는 동안 그녀는 동물농장을 본다. 덕분에 그녀의 알고리즘은 동물들의 바보 같고 귀여운 행동들로 가득하다. 그녀는 자신이 에버랜드의 푸바오를 탄생 초창기부터 좋아해 왔는데 이제 와서 푸바오가 유행하는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며 다소 홍대병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관심사를 나누고 싶어 하는 법. 그녀는 나에게 각종 동물 영상을 보여주었으나 미적지근한 반응에 실망하기 일쑤였다. 그녀가 프리미어리그를 좋아하도록 부단히도 애쓴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고, 당시 옥탑방에 살던 나에게 그는 종종 강아지를 맡겼다. 내 방에 강아지가 온다는 소식에 가장 들뜰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제 뻔하다. 그녀는 내가 강아지를 맡는 날이면 일정 변경을 불사하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있다가 강아지가 주인 곁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녀는 엉엉 울곤 했다. 필자가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할 때에도 우직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였다. 지나가던 강아지에도 심장의 울컥거림을 느끼는 그녀에게 강아지와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자극이었고, 가족과도 같은 유대감을 느끼기엔 충분한 경험이었나 보다. 한편, 내가 강아지를 맡기기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친구는 꽤나 자주 강아지를 맡겼고, 여자친구가 집에 찾아오는 빈도도 그만큼 늘어났다.
부끄럽게도 난 그 강아지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저 자식은 누워서 배만 까도 이쁨을 받고 똥오줌만 잘 가려도 기특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니, 그동안 나의 노력은 대체 무엇을 위함이었는가. 이런 사나이답지 못한 생각을 배설하고 나면 그녀는 "너와 강아지는 기준이 다르다. 보다 까다로운 기준이 적용되는 너를 당연히 더 사랑하지 않겠는가"라며 한껏 움츠러든 어깨를 애써 다독인다. 평소 질투심이 강한 편이긴 해도 동물을 대상으로 까지는 아니었는데, 가까운 사이의 강아지가 생겨버린 이후로는 정말 위기감이 느껴졌을 정도로 그녀의 애정은 강력했다.
이쯤 되면 왜 사람은 귀여운 것에 호의적이게 되는지 궁금해진다. 생태학자 콘래드 로렌츠(Konrad Lorenz)는 본능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아기들의 귀여운 생김새를 '베이비 스키마(Baby schema, 유아도해)'라고 정의했다. 사람은 작은 몸, 큰 머리, 둥근 얼굴, 큰 눈, 작은 코, 통통한 팔다리와 같은 특징을 보면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 학자들은 인간이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유리하도록 아기를 보면 귀여움을 느껴 보호본능을 일으키게끔 진화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인간 아이가 아니더라도 아이의 특성을 갖춘 대상에 대해 귀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심지어 무생물일지라도). 번식력이 굉장히 낮은 판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단지 귀여워서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늑대와 개는 유전적으로 같은 종인데, 자연선택설에 의하면 과거에 늑대의 돌연변이 중에 인간을 덜 두려워하는 개체가 인간 근처에서 살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의 종으로 자리 잡은 것이 개라고 한다. 아기 같은 것에 보호본능을 느끼는 인간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귀여운 개체일수록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물론 최근에 들어서는 각종 품종 개량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귀여워지기도 했지만. 여하튼 강아지는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귀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아지에 대한 질투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여태 길게도 설명했다.
그래도 익숙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자친구와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필자도 동물을 조금씩 좋아하게 됐다. 아마 우리 집에 강아지가 들락거리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지 않았나 싶다. 귀찮게 굴면서도 귀여운 표정으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다 보면 왜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는지 알 것도 같다. 이제는 나의 SNS 알고리즘에도 뜨는 귀여운 아이나 동물 영상을 여자친구에게 보내주곤 하며, 귀여운 새끼 동물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그녀와 함께 긴 시간 동안 감상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행동 뒤에는 여자친구에게 예쁨을 받고자 하는 의도 또한 조금은 존재한다. 그런데 가까운 친구들도 삼둥이나 윌리엄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걸어놓는 것을 보니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귀여운 것을 좋아하거나 그러는 척을 하도록 진화한 듯하다.
최근 무더위가 심한 날 강아지에게 부채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를 길에서 본 적이 있다. 누구라도 짜증이 날 만한 더위였는데도 자신보다 강아지의 쾌적함을 더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며 외모나 행동이 귀여우면 대가 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너무 커버려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필자가 강아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질투심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 귀엽고 바보 같은 것이 능력이라니, 사회초년생으로서는 참 부러운 부분이다. 정말인지 개팔자가 상팔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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