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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U T?

by ALGORITHM

이젠 피할 수가 없다. MBTI는 20대 현대인들의 대화에서 시그니처 사운드 같은 존재가 됐다. 그런 거 없이 진행할 수 있음에도 기어코 꾸역꾸역 등장하고 만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시가 바쁜 현대사회에서 MBTI는 꽤 많은 정보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오죽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며 진실을 바라보려는 이들을 프로토타입으로 삼아 “너 T야?”라고 물어봄으로써 자기반성을 요하는 형태의 밈이 메인스트림이 되었겠는가. 이미 2022년 3월 12일 ‘놀면 뭐 하니?’의 128회차 방송으로 ‘MBTI 특집’이 방영되며 사망선고가 내려졌건만 MBTI는 팔아버린 주식처럼 끝을 모르는 상승세를 맞이하고 있다.

MBTI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이들은 보통 자신을 16가지 틀 안에 규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오히려 테스트 결과가 너무 정확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싫거나, 아니면 그냥 반골 기질을 가져서 시대의 흐름에 반하고 싶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첫 번째 경우에 가깝다. 스스로의 의지로 총 두 번의 MBTI 테스트를 해봤는데, ‘F’와 ‘T’가 한 번씩 나왔다. 너무 감성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상태로 지내는 것이 나쁘지 않았고, 세 번째 테스트를 함으로써 둘 중 하나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삼세판의 요건을 만족시키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애매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던 중 모 쇼핑센터에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토이스토리’ 장난감이 들어있는 가챠(뽑기) 머신을 마주했다. 평소 ‘알린’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던 여자친구를 위해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타코야끼 트럭을 기대하며 지갑에 아껴둔 오천 원짜리 지폐를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의 앞엔 마찬가지로 해당 가챠 머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이미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고 있었다. 어머니께선 아들의 손을 잡아 직접 손잡이를 돌리게 했고, 굴러 나온 플라스틱 공을 손으로 가리며 그 안에 무슨 캐릭터가 있기를 원하냐고 물었다.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는 아이는 고민 끝에 ‘우디’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적처럼 공 속에서 우디가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나와 내 여자친구는 기뻐서 박수가 나올 지경이었는데, 그 아이의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한 표정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3천 원짜리 장난감을 얻은 아이가 느낀 기쁨은 나에게도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마주하며 ‘평소에 그 아이가 소극적이어서 교우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많은 쇼핑몰에 와서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상상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미 내 머릿속에 그 아이는 학교가 싫은 불쌍한 아이로, 엄마는 살신성인으로 아이를 위하는 따뜻한 어머니로 자리 잡았다. 이후 우리 차례가 되어 진행한 가챠에서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나 바라던 ‘알린’이 나왔고, 매우 기뻤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표정과 내가 상정한 상황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물론 이런 상상의 기반에는 짧게 마주한 상황 그 이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 아이는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뭐래 병신이”라고 한 뒤 부분 염색을 한 친구들과 PC방에 가서 패드립을 시전하며 깔깔댈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특정 상황을 마주하며 내가 어디까지 그려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해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꽤나 만족스러웠다. 이후 나는 첫 번째 검사 결과인 ‘INFP’ 쪽으로 맘이 기울기 시작했으며, 앞으로 나 자신을 MBTI로 소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떳떳하게 “인프피”라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령 그것이 ‘씹프피’로 불리더라도. 이제는 검사 결과가 INFP로 나오지 않을 것이 무서워졌기 때문에 앞으로도 MBTI 검사를 하지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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