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추정의 원칙
‘무죄 추정의 원칙은 법치국가에서 자유인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전에 법으로 정해놓은 죄'를 범하여 '사회적으로 합의된 형벌'을 받게끔 해야 하며, 이를 수행하는 절차가 바로 형사소송이다. 그런데 일개 개인은 공권력보다 약하므로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유죄를 입증할 책임을 국가에 부여한다. 여기서 무죄 추정의 원칙은 수사기관의 논증에 따라 피고인의 범행 사실에 합리적 의심이 사라져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피고인의 이익을 국가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한다는 형평적(衡平的) 대원칙이다.’
그렇다. 현대 국가에서 위법사실을 의심받는 개인은 국가의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 위에서 기술된 것처럼 사전에 법으로 정해놓은 죄를 범했을 때, 사회적으로 합의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국가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개개인의 합의체로서 일종의 계약관계로 권리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중요한 것이고, 이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범죄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구속할 권리를 부여받은 수사기관은 개인에 비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어 개인과 국가 간의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종적으로 법원의 판결을 통해 유죄를 확정받을 때까지는 무죄라고 우리는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수사기관에 바짝 붙어 있는 언론이 나서서 무죄 추정의 원칙을 박살 내고 있다. 수사기관도 언론의 힘을 십분 이용하고 있는데, 수사 중인 사건 내용을 언론에 슬쩍 흘리는 경우가 그렇다. 최근 권지용의 마약 투약 의혹을 들여다보자.
어느 순간 언론에 유명 연예인이 마약 투약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경찰에서 내사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돌았다. 그러더니 권지용이라는 이름이 속보로 떴고, 이내 누리꾼들은 그간 권지용이 보였던 이상 행동 영상들을 짜깁기하여 그가 ‘약쟁이일 것’ 같은 느낌을 부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사자가 직접 경찰에 자진 출석했다. 헛소문을 조기에 진화하기 위함인지, 선제적 대응으로 수사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경찰서 앞에 서자 기자들은 질문을 시작한다.
‘염색이나 탈모는 언제 하셨나요?’
라는 질문으로 마약 투약 사실을 희석하려는 의도가 있는 사람으로 몰아가더니,
‘언급되고 있는 강남 소재 유흥업소에는 아예 출입한 적이 없으신가요?’
라며 사건과 연관성을 빌미로 사적인 질문을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대뜸 던져버린다.
나였으면 눈에서 레이저를 쐈을 질문들이 기자라는 이름 하에 그에게 취조하듯 쏟아진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에게 이런 무례한 질문, 거의 수사하는 듯이 캐묻는 질문을 할 권한을 주었는가?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마디 하란다. 이 기자가 대표로 여러 질문들을 수합해서 한 질문이라지만 인격적으로 너무하지 않은가? 권지용은 가수라는 이유로 수사기관과의 줄다리기를 앞두고 왜 이런 질문을 당연하게 받아야 하는가? 내게는 많은 사람들이 볼 뉴스거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뿐 그 이상의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4시간의 조사 끝에 그가 경찰서를 나섰다.
‘경찰에 어떤 입장 소명하고 나오셨습니까?’
‘무혐의 주장하시는 데 그 입장은 그대로이실까요?’
‘모발 제출하셨다고 하셨는데, 휴대전화도 제출하셨나요?’
‘오늘 조사에서 경찰이 증거라든지 제시한 부분이 있을까요?’
다시 한번 탄식이 나온다. 그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권리가 헌법에 명시돼있다. 헌법 위에 카메라와 마이크다. 대답 안 하기 참 난처한 상황인 걸 정확히 알고 질문한다. 가수는 이미지로 먹고 사니까.
그가 마약 투약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형을 확정받을 때까지는 그는 무죄 아닌가. 여러 방송사에서 패널들을 모셔와 말을 쏟아낸다. 행동이 이상하다, 정서가 불안정해 보인다는 둥. 그리고 며칠 뒤, 경찰에서 또 슬쩍 권지용이 조사받으러 왔을 때 머리를 제외한 온몸을 제모한 상태였다고 언론에 흘린다. 그가 마약 투약을 안 했으면 어쩌려고들 이러는가.
그러자 몇 년 전 한 연예인의 사례를 들며 누리꾼들은 다시 한번 권지용을 죄인으로 만든다. 수사기관 대 개인의 대결. 다시 한번 강조한다. 유죄와 무죄를 다투며 증거를 두고 벌이는 승부에서 법은 수사 기관에 비해 개인의 힘이 약하니 무죄 추정을 원칙으로 한다고 정해놨다. 그런데 수사기관은 언론이라는 강력한 힘을 동원하고 있다. 언론은 칼춤을 춘다. 그리고 누리꾼들은 쉽게 흔들린다. 비단 권지용 케이스뿐 아니다. 전 펜싱 국가대표 남 선수에 관련한 스캔들에서 왜 한 라디오는 남선수를 불러놓고 개인의 내밀한 성생활까지 묻는가?
언론에게 고하고 싶다. 오버하지 좀 마시라. 조회 수가 중요하지만 인륜을 지켜가며 시민들에게 충성하는 언론의 본령을 다시 한번 되새기시라. 당신들 그러다 사람 잡겠다.
수사기관에 고하고 싶다. 증거를 충분히 모으고 소환하시라. 슬쩍 슬쩍 언론플레이하면서 간 보지 마시고.
나를 비롯한 모든 시민들에게 고하고 싶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정해져 있으나,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이 사건들 외에도 많은 순간에 의심하고 문제 제기할 수 있지만, 증거들에 의해 최종 판결을 받을 때까진 확정 짓지 말자고.
대한민국 헌법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사실 마약 투여한 게 대중의 지탄을 받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미지가 망가져서 위약금을 물게 되고, 손해를 입게 된 당사자들이 아니라면 솔직히 무슨 상관인가. 팬으로서 허탈함을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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