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번. 우리는 김장을 한다. 고모 중에 한 분이 한 해 동안 직접 농사를 지은 배추와 무를 가지고 약 200포기 가량의 배추김치를 담근다. 그러면 친척들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김치 통을 들고 모인다. 거기서 내 역할은 이렇다. 배추를 절인 날, 그러니까 본격적인 김장을 시작하는 전날 고모 댁에 가서 무를 채 썬다. 그리고, 김장 요령이 전혀 없는 나는 다음날 ‘시다’로 전락하는 것이다. 배추를 가져와라, 통을 옮겨라, 커피를 타와라 등.
재미있는 사실은 김장의 대부분은 김치를 얻어 가는 우리의 혈육들의 손에 의해서가 아닌, 김장주(농사를 지어 김장을 벌인 고모)의 이웃들이 삼삼오오 모여 빠르게 처리하고 떠난다. 품앗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우리는 즉 나와 부모와, 고모의 식구들은 그렇게 쉽게 김장을 하곤 했다. 김장의 규모가 크다 보니 김치의 맛도 제각각이었다. 김치 소로 배추를 색칠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양념으로 배추를 떡칠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집에선 올해 김치가 너무 맵다고 아우성치는가 하면, 어떤 집은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하는 웃픈 해프닝도 매해 반복된다. 그게 집단 김장의 묘미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번엔 평일에 김장을 해서인지 마을 아주머니들 (나는 그들을 김치 베테랑이라고 불렀다.)이 통 안 왔다. 그래서 고모, 엄마, 사촌누나(김장주의 딸)까지 고무장갑을 껴야 했고, 나 역시 평소엔 적어도 셋이 했을 목을 혼자 해내야 했다.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절여진 배추 나르기를 반복하다가 김칫소 위로 수육이 우수수 떨어진다.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그때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시다인 나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입을 벌린다. 어느새 입 주변은 빨갛게 변해있고, 나는 매운맛을 달래기 위해 거친 들숨을 들이킨다. 평소였으면 벌써 김장을 마무리했을 시간이지만 좀처럼 진척이 없다. 그리고 한 김치 베테랑은 내게 작고 예쁜 배추들을 가져오라고 주문한다. 나는 그녀의 추상적인 주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노랗고 흰 속살을 가진 배추들을 골라서 들고 간다. 체력이 떨어져 가는지 끙 소리가 절로 난다.
‘작은 거 들고 오라니까 엉뚱한 거 들고 왔네.’
나는 그녀의 장난스러운 타박이 전혀 밉지 않다. 그녀는 우리가 일 년 내 먹을 김치를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대야를 들고 절여진 배추들을 향해 간다. 나는 맨손으로 배춧속을 헤집으며 들여다본다. 같은 품종으로 뿌려져 같은 해와 바람, 비를 맞고 자란 배추 속도 이렇게 제각각인데 사람 속이야 오죽하랴는 순간적인 감상에 젖기도 잠시, 내 이름이 불린다.
나는 그렇게 이틀간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감기 중에 가장 괴로운 목감기와 눈이 빠질듯한 두통, 입술은 바짝 마르고 코에는 눅진한 콧물이 가득한 부조화를 흠씬 느꼈다. 그래도 친척들 집 어딜 가도 늠름하게 자리할 김치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지어진다.
배추 속도 제각각인데 사람 속이야 오죽하랴. 피를 나눈 부모 형제와도,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와도 제각각인 게 사람 마음. 그런데 모두 다른 그 사람 마음은 김장을 하면서 올 한 해 가족들에게 맛있는 김치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으로 모이지 않았을까. 아무리 가슴이 따뜻해지고 풍족해져도 내년 김장은 절대 안 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