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스물 여섯 (만), 평소 같으면 귀가를 할 타이밍인 토요일 오후 열시에 멋을 한가득 챙겨 홍대로 나섰다. 헨즈(HENZ)에 가기 위해. 아니 사실 너무 멋을 부리는 건 언쿨하기에 나름 적당한 수준으로 멋을 냈다. 여자친구와 안정기를 맞이하고 난 뒤엔 클럽에 발길이 끊기게 됐고, 설령 가더라도 그녀와 동행했다. 클럽을 싫어하는 여자친구도 헨즈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녀가 좋아하는 '콜드(Colde)'가 그의 레이블 식구들을 데리고 헨즈에서 종종 파티를 열었기 때문이리라. 이번 방문은 거의 1년 만이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클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주로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 즈음에 들곤 하기 때문이다. 그 시즌이 아니라면 집에서 노래를 크게 틀고 아무도 보지 않는 춤을 추는 것만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서울의 꽤 외곽에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홍대에 가는 것은 큰 결심이 필요하다. 막차가 끊기는 늦은 시간에는 더욱. 하지만 오늘을 놓치면 또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할 것만 같은 예감에 평생의 클럽 파트너의 손을 잡고 손등에 보라색 도장을 찍으러 갔다.
필자는 헨즈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다. 힙합을 좋아했던 터라 유튜브에서 래퍼들이 헨즈의 DJ 테이블에 쪼그려 앉아 유선 마이크를 감싸 쥐고 랩을 하는, 힙합 버전 직캠을 수없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왜 굳이 천장에 부딪힐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저 위치에서 라이브를 하는지 지금에 와선 이해가 안 가는 면도 있지만, 헨즈에서는 저렇게 불편하게 라이브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국룰이다. 유튜브에 '헨즈 라이브'를 검색하면 이해를 도울 예시들이 좌라락 나온다. 이처럼 헨즈는 단순한 클럽이 아니라 어떤 문화를 전승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항상 자리했다. 헨즈의 음악은 뭔가 달랐고,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쿨했다. 아니 사실 다른 핑계는 차치하더라도, 좋아하는 래퍼들이 스쿼트 자세로 파티를 하는 것만으로 그 시뻘건 지하를 좋아할 이유는 충분했다.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봤을 법한 '국힙 상담소'의 촬영도 헨즈에서 이뤄졌다.
인파로 인해 후덥지근한 홍대입구역 9번 출구에는 계단을 내려오는 지친 얼굴과 오늘 여명을 보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엇갈렸다. 인파가 예전만큼 못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정체를 알기 힘든 건물들 앞에서 장사진을 치며 입장만을 목놓아 기다리는 이들을 마주했고,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게 핫 플레이스가 탄생하는 와중에도, 홍대는 묵묵히, 아니 매우 시끄럽게 그 자리를 지키며 매일 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의 목적지였던 헨즈는 웨이팅은 고사하고 열두시 이전 입장 시 무료입장이라는 파격적인 이벤트를 내걸고 있었다.
성공을 위해선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툭하면 'All I Do Is Win'이나 'Young, Wild and Free', 'Oui', 'CoCo'가 나올 것만 같은 곳엔 줄을 서면서 헨즈를 외면하는 것은 정말인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열한 음악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 클럽은 모름지기 새로운 음악을 들으러 가는 곳이다. 다른 이들에게 이를 강요할 생각 까진 없지만, 마치 유튜브에서 '힙합 클럽에서 환장하는 외힙'과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트는 듯한, 누가 봐도 짜치는 곳에 땀 흘려가며 대기하는 꼴은 봐주기 힘들었다. 일종의 선민의식 같긴 하지만, 이런 면에선 꼰대 기질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빈지노가 등장했을 당시 가리온이나 피타입이 최고라고 믿던 이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런데 헨즈에 입장하고 나니 사람이 꽤 있어 이런 고찰이 조금은 민망해지기도 했다.
헨즈는 여전히 세련됐고, DJ들의 세트리스트는 훌륭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필자는 DJ의 역할에 대해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날 DJ가 바뀜에 따라 호응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DJ의 능력치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테이블에 가까이 붙어 DJ가 즉석에서 다음으로 틀 곡을 고르는 모습을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했으며, 다음 차례의 DJ가 이전 DJ의 플레이를 끊지 않은 채 자신의 USB를 꼽고 어울리는 곡을 찾아 바톤터치를 하는 모습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여자친구와 '오늘 무조건 뉴진스 노래가 나올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역시나 나와서 매우 신나면서도 'DJ들은 뉴진스 없었음 어쩔 뻔했나?'라는 생각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한편,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구석에서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펼쳐졌다.
헨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도 예전만큼 인진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곳을 찾았다. 유사 힙합 클럽들이 헨즈보다 잘 되는 것은 맘에 안 들기도 하지만, 어찌 됐건 그들도 인기를 끌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헨즈를 찾지 않은 탓에 멋진 곳에서 웨이팅 없이 술값만 치르고 즐겁게 놀 수 있었지 않은가. 일 년에 하루 정도 방문하는 간헐적 헨즈 클러버가 이따위 판단을 내리는 것도 웃기긴 하다. 사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혼자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택시비 2만 5천 원이 아깝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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