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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난슬 Dec 03. 2022

새롭게 기대되는 것

새로운 계절이 왔음이 와닿는 시기는 언제나 봄이 아니라 가을이다. 평소처럼 집을 나섰는데 코에 들이닥치는 공기가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와 많이 달라졌다고. 그런 시기가 오면 슬슬 옷방에 걸려있는 짧고 시원하고 가벼운 옷들을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옷들을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있던 두껍고 따뜻하고 무거운 옷들과 교환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옷을 넣고 어떤 옷을 꺼낼지에 대한 이야기를 여자친구와 나눈다. 한 번 들어가면 내년 봄이 올 때까지는 다시 끄집어낼 용기가 안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중해야 했다. 여름옷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잠옷이 된다. 오프라인 쇼핑이 귀찮고 부담스럽다는 것을 10대 때 깨달아버린 나는 주로 온라인에서 옷을 샀다. 직접 보지 않고 고른 옷들은 자주 만족스러웠지만 가끔은 다시 볼 일 없을 것처럼 서먹했다. 반품을 하는 것조차 귀찮았던 때에 산 옷들은 그렇게 모조리 잠옷이 된다. 잠옷을 풍족하게 쌓아둔 뒤에는 본격적인 겨울 옷 꺼내기를 시작한다.


나와 여자친구는 체격 차이가 크다. 그래서 여름옷은 함께 입기 어렵지만 겨울 옷은 함께 입기 쉽다. 작은 것은 몸에 끼우기 힘들어도 큰 것은 대충 설렁설렁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친구 옷을 내가 입으면 내 부피가 몹시 커진다. 슬쩍 보면 곰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겨울은 원래 모든 사람이 곰이 되거나 아기 곰이 되거나 하는 날씨라서 개의치 않고 조금 뚱뚱해진 몸으로 집을 나선다.


그렇게 익숙하고도 낯선 옷을 입고 나선 뒤 맞이하게 된 가을은 무언가 새로운 마음을 먹게 되는 계절이다. 보통은 겨울인 연말이나 연초에 그렇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 시기쯤 되면 이미 마음이 시들해진다. 줄곧 더운 공기가 코에 들어박힌 여름과 가을은 그 차이가 더 선명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이 계절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늘 여자친구와의 첫 만남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내가 많이 말하고 많이 쓴 일화이기도 하다. 무언가 변했다고 느껴지는 때에 나는 늘 어떤 사건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처음으로 가서 그 때의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를 생각하려 하게 된다.


서울에 비하면 시골이라 부를 수 있는 작은 동네에 살았던 어떤 날에는 친구들끼리 다 같이 손을 잡고 서울로 간 적이 있었다. 롱패딩이나 숏패딩이라는 말도 없었던 때지만 어쨌든 옷을 잘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서울로 가기로 한 친구들도 그랬다. 덩치가 조금 커진 상태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 새벽이었고 바깥은 캄캄했다. 어두운 때에 친구들끼리 모여서 바깥으로 나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착지까지는 4시간이 넘게 남은 상태였고 우리는 꾸벅꾸벅 졸거나 별 거 없는 이야기를 했다.


서울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는 지하철을 탔다. 부산에서 지하철을 탄 적은 있는데 서울에서 타는 건 처음이었다. 열차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는 사이에 친구 중 누군가가 말했다.


서울에서는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간대.


그러자 다른 애가 눈을 감았다 떴다. 누구도 그 애의 코를 베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차원에서 만든 말이겠지만 우리는 문장 그 자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낄낄거렸다.


그러고 나서 다 같이 손을 맞잡았다. 그때도 스마트폰 지도 어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 명이라도 떨어져서 헤어지게 되면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어서 무서웠던 것 같다. 손을 꼭 잡은 탓인지 아님 낯선 공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한 탓인지 누구도 낙오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라 떨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떠올리고 웃을 수 있는 경험이 된 것이다.


왜 가을이 되어서 손이 시리고 코가 찡해지면 이런 일화들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너무 감성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혼자서 용을 쓰고 있다. 좀 감성적이게 되면 뭐 어떤가 싶다가도 이런 부분을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그렇지만 자꾸 두려워만 하면 어떤 것도 더 좋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 과거에 조금 용기를 내서 했던 행동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힘을 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취업을 하거나 대학원에 가는 시기에 다시 대학 입시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렇게 얻어진 용기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춥고 또 봄이 가까운 계절이 되었을 때 대학교에 간다. 입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휴학을 하든 졸업을 하든 하게 될 것이다. 막 추워지기 시작한 이 계절에 코를 훌쩍거리며 더 나은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읽고 쓰고 있다. 읽기와 쓰기가 바탕이 되는 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여태까지 하던 것보다도 조금 더 힘을 내야 할 것이다. 꼭 계절별로 결심하기를 나누는 건 아닌데도. 가을이면 새롭게 기대되는 것이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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