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친구

by In l ll

친구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나를 기준으로 옆에 두었던 이들을 떠올리기보단, 내 옆에 두고 싶은 이에게 그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 돼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가짐이 어릴 때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마음은, 결국 자연스레 나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었다. 순간의 거리감, 언제든 쉽게 바뀌는 거리감에, 그와의 관계가 멀어졌다 줄어들었다 해도, 지금까지 연을 이어오고 있는 그 '친구'를 만난 건 이때쯤이었다.

서로 그때 이야기를 하면, 아마도 이 정도의 친밀감은 아니었을 거라 말한다. 그냥 같은 반이었다. 사실, 이때 함께 찍혔던 사진이 아니면 같은 반이었단 기억도 가물가물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나는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2학기 때는 다른 반으로 옮겨갔다.

아무튼, 그 관계성이 깊어지기 시작한 건, 친구가 같은 아파트의 15층으로 이사 오기 시작한 후였다. 바로 5층 밑, 밖에 나가지도 않고 계단만 내려가면 놀러 갈 수 있는 거리에 친구 집은, 우리를 시도 때도 없이 붙어 다니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친구네 집은 부모님 모두 맞벌이로 나가시면 늦은 시간까지 형과 친구 둘뿐이었기에, 나는 학교를 마친 오후나, 방학 때면 거의 매일 그 집에 놀러 가곤 했다. 가서 하는 일은 주로 게임이었다. 그 집은 컴퓨터가 두 대였기에, 형과 같이 셋이서 돌아가며 게임을 정말 많이 했다.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었고, 저녁때가 되면 가끔 집에 가지도 않고 그 집에서 그냥 자고 가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조금 경계할 만한 생활이지만, 그때 당시의 그런 자유로운 생활은, 재밌고 행복하기만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재수와 대학교까지.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관계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그 불변의 안정감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 생각했다. 스물한 살. 대학에 들어가 자취를 시작하고, 친구들 모두 꿈 많은 시절을 보내던 순간에, 여느 때처럼 평범한 전화를 받았다. 자기는 부과대가 되었댄다. 늦은 저녁, 침대에 누워 무심하게 받던 그 전화에, 불현듯 스며들던 위화감. 숨이 가쁜 듯한 작은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들어, 나는 "왜?"라고 물었다. 그러자 터지는 울음과 말들, 불안한 순간이면 언제나 속으로 삭히기만 하던 그의 습관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터져 버린 걸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그의 마음이 왈칵 쏟아지던 순간, 나는 어떠한 말도 건넬 수 없어 그저 빠르게 검은 옷을 챙겨입고 심야버스를 탔다. 나 어떡해, 어떡해야 돼, 라는 말이 그 어둑한 버스 안에 계속 울퍼졌다.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 한 시. 멍한 얼굴의 어머니와 희멀건 웃음으로 나를 반기는 친구. 당시 부대에 있던 형은 아직 오지도 못한 상태였다. 하나둘 도착하는 친척들과 다른 친구들, 나는 고맙지만 빈소 준비가 안 되어서 내일 와줬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말에, 다음 날 다시 그곳을 찾았다. 어느새 상주 옷을 입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민머리의 형이, 나를 보고 다가왔다. 그저 말없이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는 형. 나는 어느새 옆에 선 친구를 따라 조문을 드리고,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을 주워 먹다, 웃음과 무표정이 교차하는 친구와 고개를 쉽게 들지 못하는 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장례식장을 나왔다. 친구의 아버지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형제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항상 재미와 웃음을 주던 사람이었다. 매번 그들을 야구장에 데려가고, 그들과 같이 캐치볼을 하던 분이었다. 나는 환하게 웃는 표정의 영정이 계속 생각났다. 걸음걸음, 덩달아 멍한 표정으로 어느새 본가 집에 거의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들어섰을 때, 문득 15층 버튼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곳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들이 단란하게 살아가던 그 안정되고 따듯한 공간이, 15층 앞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면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으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껏 변한 적 없던 예전의 공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한 이삼 년 전, 대략 스물다섯. 인천에 갈 일이 생겨 이사한 친구의 집에 하루 머물렀다. 여전한 형과 어머니, 그리고 친구. 나는 친구 방 책상 위에 놓인 카메라에 관해 물었다. 사진을 찍는 취미가 생겼냐고. 친구는 아버지 것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도 사진 찍는 취미를 가져보려 한다고 말했다. 남는 건 결국 사진밖에 없다고 덧붙이는 친구의 말에, 카메라 옆에 놓인 아버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계셨다.

나는 이사한 친구의 집도 여전하다고 느꼈다. 내가 그리던, 그 계단을 내려가 띵동 초인종을 누르면, 서로 장난을 치다 겨우 문을 열었던, 그 여전한 집처럼, 시간이 흘러도, 공간이 변해도, 멀리 떨어져도 있어도 여전한 것들이, 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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