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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Sep 01. 2019

카를로비 바리, 비 내리는 체코 온천도시가 준 선물

완벽하지 않은 여행의 특별한 추억

 여행 기념품들은 알고 보면 특별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건 자체보다는 여행의 추억이 담겨 있어 기념품은 의미가 있다. 카를로비 바리에서 만난 갑작스러운 비는 우리 남매에게 특별한 선물을 남겨줬다.


 '체코'하면 '프라하'가 떠오르지만, 나와 동생은 체코 여행을 계획하면서 프라하 외에도 근교 도시들을 여행하기로 했다. 첫 번째는 카를로비 바리, 두 번째는 체스키 크롬로프였다. 두 도시는 프라하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2시간 30분~3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프라하에서 '유럽뽕'에 맘껏 취한 후 카를로비 바리를 여행했다.


프라하 플로렌스 버스터미널


 여행의 교통편을 담당한 나는 여행 한 달 전 레지오젯/스튜던트 에이전시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왕복 버스표를 예약했다. 카를로비 바리 티켓은 여유 있었던 반면 체스키 크롬로프 티켓은 까딱하면 구입하지 못할 뻔했다. 체스키 크롬로프가 유명 관광지라 한 달 전에 이미 많은 좌석이 예약돼 있었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뒤 각 플랫폼마다 적힌 도시 이름들을 봤다. 뮌헨, 빈 등 유럽 도시 이름들이 나열된 것을 보니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을 여행 중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체코의 버스 터미널은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플랫폼 번호에 따라 도착지 버스가 정차한 후 승객들을 확인하고 짐을 실었다. 우리는 프라하에서 카를로비 바리로 당일치기 여행을 했던 터라 캐리어 등 큰 짐은 없었다.


레지오젯 버스 좌석 앞 스크린


 버스에는 승무원이 있었다. 승무원은 출발, 도착 전 안내 멘트를 하거나 이동 중간쯤 승객들에게 음료가 필요한지 물었다. 커피는 무료로 제공됐는데, 한국의 믹스커피와 비슷하면서 조금 더 밍밍한 맛이었다. 

 각 좌석에서는 TV를 보고, 라디오 혹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헤드폰은 승무원이 출발 전 나눠주고, 도착 전 다시 회수해서 별도로 이어폰을 준비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핸드폰 등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USB 단자도 구비돼 있었다.

 버스 내부에는 화장실이 있어서 신기했다. 짐을 실을 수 있는 버스의 높이는 높은 편이었는데, 중간 출입구 옆에 화장실이 있었다. 유료 화장실이 대부분인 체코에서 유용해 보였으나 버스 화장실을 실제로 이용해 보지는 않았다.


카를로비 바리 풍경


 카를로비 바리는 온천수가 유명한 도시다. 1349년 보헤미아 왕 카를 4세가 창설한 이 도시의 이름은 '카를 왕의 온천'이라는 뜻이다. 온천도시답게 휴양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나 몸이 불편한 분들이 자주 보였다. 한적한 도시인 카를로비 바리는 작은 강을 따라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됐다. 


온천수를 맛볼 수 있는 콜로나다


 도시 곳곳에는 온천수가 나오는 '콜로나다'가 있다. 콜로나다는 우리말로 '회랑'을 의미하는데, 온천수를 마실 수 있게 회랑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콜로나다 근처에는 온천수를 받아마실 수 있는 작은 컵들을 판매하고 있다. 컵 위쪽으로 온천수를 받아 손잡이 끝에 뚫려있는 컵 주둥이를 통해 온천수를 맛보면 된다. 온천수는 온도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하지만, 온천수 특유의 비릿한 쇠맛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맛보다는 도시를 걸어 다니며 콜로나다를 찾는 재미가 있었다.


오플라트키

 

 카를로비 바리에서는 체코 플젠 지역에서 양조되는 맥주 '필스너 우르켈' 직영 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필스너 우르켈은 '아저씨 맥주 맛'이 나는 편이다. 전통적인 맥주의 향과 맛이 진해서다. 내 입맛에는 잘 맞아서 체코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은 더 찾아 마셨다. 30대 중반은 아저씨가 맞는 것 같다.

 유명한 먹거리 중 하나인 오플라트키도 맛봤다. 한국의 뻥튀기를 닮은 간식이다. 초콜릿 등 취향에 따라 맛을 선택할 수 있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구경을 하며 먹기에 적당했다. 

 

카를로비 바리 기념사진 포인트


 오전에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갔던 카를로비 바리 하늘이 오후가 되자 다시 어둑해졌다. 다시 프라하로 돌아가기 전 2시간 앞두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만난 비에 길거리 식당 천막 안으로 몸을 피했다. 잠시 지나갈 줄 알았던 비는 계속 내렸고, 나와 동생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그 순간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관광객이 많아 부산스러웠던 프라하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적막함, 그 속에 떨어지는 빗방울. 카를로비 바리는 내 기억 속에 툭툭 내리는 빗방물의 도시로 각인됐다. 반갑지 않은 비 덕분이었다. 


카를로비 바리 버스 터미널


 동생은 갑자기 쏟아진 비에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 안 올 거 같아서 우산 두고 왔는데…." 동생은 한국에서 접이식 우산을 챙겨 왔다. 동생은 당일 비 예보에도 짐이 무거울 것 같아 프라하 숙소에 두고 왔던 것이다. 항상 챙겨 다니던 우산이 하필 그날은 없었다. 나는 "괜찮아, 이것도 다 추억인데 뭘"이라고 다독였지만, 동생은 마음이 편치 않아 보였다. 결국 동생은 "잠깐만 기다려"라며 빗속을 뚫고 뛰어갔다. 


카를로비 바리 풍경


 10분쯤 지났을까. 동생은 비닐우산과 함께 돌아왔다. "돈을 다 써버렸어…3단 우산은 더 비싸더라고. 우산 파는 아저씨가 잔돈까지 싹 털어갔어." 멀리서 우산을 쓰고 뛰어오는 동생이 반가웠는데, 동생의 표정은 금세 또 어두워졌다. 우리가 챙겨간 돈을 우산을 사느냐고 다 써버린 탓이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동생은 잔뜩 풀이 죽었다. "여행 기념품 하나 더 생겨서 좋잖아." 동생에게 건네받은 우산을 같이 쓰면서 내가 말했다.


 동생은 워낙 책임감이 강한 반면에 계획이 틀어지면 모든 걸 자신의 잘못으로 돌린다. 나도 그런 편이어서 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는 30분 더 줄기차게 내리다가 버스 터미널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쳤다. 그제야 우산을 살펴봤다. 우산의 비닐 면은 프라하 유명 장소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 카를로비 바리에서 프라하 기념품을 산 셈이다.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카를로비 바리 기념품이 아닌 체코 기념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카를로비 바리에서 구입한 비닐우산


 비닐우산에는 동생의 마음씨도 담겨 있었다.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카릴로비 바리에서 평생 기억할 만한 남매의 추억이 하나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비닐우산은 어느 기념품보다 소중했다. 동생이 여행을 끝내고 짐이 될 것 같아 비닐우산을 버리자고 했을 때, 나는 끝까지 우산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 중 제일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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