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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Sep 05. 2019

체스키 크롬로프, 여동생과 여행팁: 사진사가 되자

나는 찍을 테니, 너는 포즈를 취하거라

 "캐리어에 더 이상 옷을 넣을 데가 없어." 동생이 여행 전 캐리어에 한 짐 가득 옷을 챙길 때 의아했다. 내가 챙긴 옷들은 반팔 3개, 바지 1개, 잠을 잘 때 입을 위아래 옷 정도여서다. 그때는 '남자보다 챙겨갈 짐이 많구나'라고만 생각했다.


 체코에 도착한 후 동생이 짐을 풀자 의문점도 풀렸다. "이 옷은 프라하에서 입고, 이 옷은 체스키 크롬로프 가면 입고…." 그랬다. 동생은 도시마다 어울리는 옷들을 제 나름대로 챙긴 것이다. 나는 짐이 많으면 무겁고 귀찮다고만 생각했는데, 동생은 옷을 챙기며 이미 동유럽 풍경까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체스키 크롬로프 전경


 체스키 크롬로프는 프라하에서 3시간 정도 버스를 타면 도착하는 도시다. 한국에서는 tvN '꽃보다 할배'에서 소개된 후 더욱 유명해졌다. 체스키 크롬로프는 중세 유럽의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 우리를 맞이했다. 버스가 도착하기 전 창밖으로 보이는 전경은 유럽 동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 구글 지도를 따라 체스키 크롬로프 중심으로 걸어갔다. 15분 정도 걷는 동안 버스 정류장보다 낮은 높이에 자리한 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체스키 크롬로프는 붉은 지붕의 집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체스키 크롬로프 중심으로 가기 전까지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던 동생의 치마에 그제야 눈길이 갔다. 체스키 크롬로프 지붕과 잘 어울리는 짙은 붉은색 치마였다. 체스키 크롬로프와 더 이상 맞아떨어질 색상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 나는 동생의 사진사로서 이날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체스키 크롬로프


 "여기서 사진 찍어줄까?"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쯤 사진 촬영 포인트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찍히는 데 여념 없었다. "그래. 원한다면야." 동생의 말 한마디에 나는 자발적인 사진사가 돼버렸다.


 동생은 인파 속에서 머뭇거리다가 마을을 뒷배경으로 한 채 섰다. 동생의 옆에 있던 분이 사진을 촬영하고 자리를 떠나는 틈에 곧바로 촬영 버튼을 눌렀다. 다른 관광객이 오기 전에 재빨리 다시 버튼을 누르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연속 촬영을 설정한 건 아니었지만 2,3초 사이에 '찰칵'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역시 긴박한 상황은 사람의 잠재능력을 깨웠다.


 "못 생기게 나왔네. 그래도 마지막 사진은 괜찮아." 동생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진을 봤다. 5장을 찍은 사진에서 가까스로 1장을 건졌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순간 만큼은 직장 상사에게 업무를 확인 받는 줄 알았다. "에이 무슨…다 잘 나왔구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델의 기분까지 챙기는 멘트까지 할 줄 아는 사진사가 돼있었다.


버스 터미널


 여행 중 동생의 사진사가 된 건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프라하 도착부터 사진사의 길을 자연스럽게 걸었다.


 우리 남매는 평소에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서면 괜스레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동생은 생애 첫 동유럽 여행을 앞두고 단단히 마음 먹은 것 같았다. 프라하에서부터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그런 동생이 낯설었지만, 여행을 즐기는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체스키 크롬로프는 멀리서 본 모습 뿐만 아니라 지나치는 골목들도 아기자기했다. 더불어 프라하 여행부터 익숙해진 나의 사진사 역할은 정점을 찍고 있었다. 걷다가 사진이 잘 나올만한 곳에 멈춰 동생에게 "사진 찍어줄까?"라고 자동적으로 말하는 나를 발견했다. 원래 사진 찍히는 것보다 찍는 걸 좋아하던 터라 동생의 사진을 찍어주는 게 힘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만족스럽지 않은 컷들에 실망할 정도로 역할에 제대로 몰입했다.


체스키 크롬로프 성에서 본 풍경


 가장 좋은 뷰 포인트이자 사진 촬영 포인트도 발견했다. 성을 올라가는 중간에 두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발코니가 그곳이었다. 길 중간에 생뚱맞은 위치에 있었지만, 5~6명 정도가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 호기심에 우리도 대열에 합류했다. 차례가 되자 동생에게 포즈를 취해보라고 했지만, 역광이어서 인물 사진은 포기했다. 대신 체스키 크롬로프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면서 상쾌한 바람을 맞을 수 있었다. 의외의 장소를 발견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성을 둘러보고, 주변 정원도 구경했다. 동생은 정원수가 뻗어있는 길을 보더니 "사람 없을 때 빨리 사진 찍어줘"라고 했다. 나는 재빨리 동생의 핸드폰을 받은 후 촬영 버튼을 눌러댔다. 여행 4일 차가 되니 남매의 사진 찍고, 찍히는 호흡이 퍽 좋아졌다.


체스키 크롬로프 성의 정원


 "오빠도 여기 와서 서봐 내가 찍어줄게." 동생은 언제나 내게도 모델이 될 것을 권유했다. 나는 여행 내내 끈질기게도 피사체가 되는 건 거절했다. 한 번은 사진을 찍을 법도 한데, 카메라 앞에서 서는 그 민망함을 견뎌내지는 못했다. 대신 동생과 셀카는 몇 번 찍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내가 나오는 사진 몇 장 정도는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걷고, 찍고, 걷고, 찍고…. 마을을 빠져나올 땐 프로 사진사가 돼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동생과 체스키 크롬로프 풍경이 각각 반씩 노력한 결과였다. 나는 단지 성실하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됐다.


 누군가와 여행을 하면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사람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나처럼 동생도 사진 찍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도시 분위기에 맞게 옷을 준비하고, 인스타그램으로 미리 사진 찍기 좋은 장소를 알아두고, 포즈도 제법 취했다. 역시 가족이라고 해도, 가족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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