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을의 색깔은 연둣빛
색약으로 태어났지만, 생각의 색깔은 다채롭게
한 남성이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는 잠시 뒤 선글라스처럼 보이는 안경을 쓴다. 해가 지는 초저녁 하늘과 선글라스,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남성은 안경을 쓴 채 다시 지평선으로 시선을 옮긴다. "안경을 끼고 본 것 중에 제일 좀 슬프네요." 잠시 말이 없던 남성은 눈물을 훔친다. 그러다가 머쓱한지 이내 웃음을 짓는다.
남성이 쓴 안경은 색각 교정 안경이다. 실생활에서 지장은 없으나 여러 색이 섞였을 때 색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색각, 색약 이상자들을 위한 것이다. 안경을 쓰고 있을 때는 '진짜' 색깔을 볼 수 있다. 우연히 유튜브 영상을 통해 본 이 남성은 태어나서 처음 제대로 색깔을 봤을 테다. 그는 안경을 쓰기 전 노을이 연둣빛이라고 했다. 나도 노을을 보면 다른 색보다 연두색이 도드라진다.
나는 적록색약으로 태어났다. 적색과 녹색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때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던 건 초등학생 시절 신체검사를 할 때였다. 공책 절반 크기에 그려진 동그라미 안에는 숫자가 있었다. 4페이지까지 보이던 숫자들은 그다음 페이지부터 사라졌다. "이게 정말 안 보이니?" 선생님은 몇 번이고 다시 동그라미를 짚었다. "네. 안 보여요." 점들이 모여 이뤄진 숫자들은 감쪽 같이 모습을 감췄다. 그 이후 안과에서 다시 색약 테스트를 했고, 내가 적록색약이라는 걸 알았다.
사는 데 불편한 건 없었다. 실생활에서 적록색이 뒤엉켜있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스무 살이 넘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뒤 운전면허도 땄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축구 게임을 할 때면 초록색의 잔디와 붉은 유니폼이 구분이 되지 않아 종종 게임이 시작된 후 다시 유니폼을 골랐다. 그럴 때마다 "괜히 질 거 같으니까 다시 하자는 거지?"라는 친구들의 핀잔을 들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노을의 제대로 된 색깔을 본 적이 없었던 셈이다. '남들과 보는 색깔이 다를 수 있다'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적록색약으로 태어났지만 말이다. 내 안의 색깔만 보고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만큼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수많은 색깔을 본다. 워낙 다양한 색깔을 보다 보면, 그 자체를 의심할 겨를도 없다.
그렇다고 모두가 같은 색감으로 세상을 보는 건 아니다. 눈으로 보는 색깔이 아니라 생각의 색깔이다. 내가 적록색이 한 데 섞여있으면 보지 못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자신만의 색감에 갇혀 산다. 그 색깔이 빨간색이 됐든 파란색이 됐든 저마다의 색깔로 생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을 향한 판단도 그렇게 한다. 내가 평소에는 적록색약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듯,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이 색약 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생각의 색약 이상자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티가 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보이는 건 그들만의 색깔 세상이다. 자신의 색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다. 이러한 색약 이상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과 비슷한 색깔을 보는 이들과 모이게 된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색이라고 하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색각 교정 안경을 쓰지 않는 이상, 내가 보는 노을은 언제나 연둣빛이 강한 색깔일 듯하다. 하지만 눈이 색약인 대신, 생각을 통해 더욱 다양한 색들을 보고 싶다. 세상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고, 굳건하되 고집을 피우지 않고, 나를 향한 연민을 되도록 타인을 향하게 하고 싶다. 비록 남들보다 눈으로 보는 세상은 조금 탁할지라도 생각으로 읽는 세상은 다채로워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