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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Mar 13. 2020

신성한 노동 따윈 믿지 않으련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매 순간 몰입하는 것

 오전 7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한 번의 마을버스, 두 노선의 지하철을 갈아 타고, 10분을 걸어 회사에 도착하면 시작되는 하루. 세상에 같은 하루야 없겠지만,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일상이다. 


'신성한 노동.'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말을 따로 배운 적은 없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이라 익숙한 단어다. 하지만 노동에 꼭 '신성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할까.


 '노동'만 떼어놓고 보면, 노동은 고결하고 거룩하지 않다.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써야만 하는 행위다. 그 방법과 요령에 따라 투여하는 노동과 시간의 차이는 있다. 두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쓸수록 부의 차이를 만들지만, 결국 지난한 노동의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 


 우리가 굳이 등 떠밀지 않아도 아침에 일어나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드는 건 내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여서 무엇을 만들어내거나 그것을 도와야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다. 노동이라는 단어에 아무런 형용사를 붙이지 않으면 기쁨, 즐거움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만큼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한 인간의 생존 본능이다.


 반면 노동에 '신성한'이라는 표현이 붙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노동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문제보다는 그 이상의 거대한 의미를 포함한 것처럼 보인다.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이놈의 '신성한'이 들어오면 생존은 부차적인 문제처럼 보인다.


 '신성한 노동'이라고 하면 마치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희생해서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부담스럽다. 부차적인 꾸밈말을 빼면 노동은 내 삶을 이어가기 위한 몸부림이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가고, 어떠한 일을 해내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노동이 자신을 희생하며 누구를 위한 행위가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이제는 '신성한 노동' 말 따위는 믿지 않으려고 한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출근 지하철을 타는 것도, 상사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꾹 참는 것도, 퇴근 시간까지 버티는 것도 사실 모두 신성한 일들이다. 나의 생존을 위해,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노동이야말로 신성하다.


 알고 보면 노동은 그 행위 자체에 타인을 위한 행동이 담겨 있다. '신성한'이라는 말로 거추장스럽게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신성한 노동이라며, 단지 자신을 위한 노동보다 신성한 노동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자신만을 위한 행동에 누가 그 대가를 지불하겠는가. 이미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하는 행동 속에 타인을 위한 것들이 담겨 있다. 이른 새벽에 첫차를 운전하는 버스 운전기사님도,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지만 결국 승객들의 편의를 돕는다. 그 버스를 타고 출근한 회사원들은 각자 회사에서 경제적인 가치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탠다. 결국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자신의 노동은 신성한 것이 된다.


 결국 각자 자신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매 순간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 하나하나가 모여 사회를 이루고, 세상을 지탱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사는 이 곳에서 '노동'은 충분히 신성한 단어다. '신성한 노동'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누구나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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