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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Sep 15. 2022

'얄밉게 떠난 님아'…임영웅의 팬이었던 아버지

세상에는 수많은 임영웅과 그 사연들이 있을 테다

 

 아버지가 차 시동을 켤 때면 스피커에서는 임영웅이 부른 '배신자'가 흘러나왔다. ‘얄밉게 떠난 님아’라고 읊조리듯 나오는 임영웅의 목소리는 어딘가 구슬펐다. 운전할 때 듣기엔 여간해서 흥이 나지 않는 노래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노래 한 구절을 흥얼거리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배신자'는 털털거리는 아버지 차의 엔진 소리를 대신 채웠다.


 종영 후에도 '미스터 트롯' 열풍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처가에 가던 중 휴게소에 들러 '미스터 트롯' 경연 노래 모음집을 샀다. 아버지가 노래를 소장하는 건 처음이었다. 시동을 켤 때마다 모음집에서 ‘배신자가’ 첫 트랙으로 나오는 이유는 몰랐는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카 플레이어 설정이 익숙하지 않아 기본 설정으로 계속 뒀던 것 같다.


 부모님의 TV 시청 취향은 여느 부부와 같이 서로 달랐다가 나이가 들수록 비슷해져갔다. 자연스럽게 두 분이 함께 TV 앞에 있는 시간도 부쩍 늘었다. 부모님은 '미스터 트롯' 방영 내내 함께 본방송을 챙겨봤다. 밤 12시가 넘도록 TV를 시청했으니 작은 간판 가게를 같이 운영하시는 두 분은 다음 날 낮이 되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점심 때쯤 옆집 이발소 아주머니가 "어제 방송 봤어?"라고 운을 띄우면, ‘미스터 트롯’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학생들 못지않은 낯선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TV에 임영웅이 나오거나 임영웅에 대한 대화가 나올 때면 "임영웅은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굉장히 넓다"고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에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는 아버지가 가수에 대해 말하거나 평가한 건 나훈아 이후 처음이었다. 특별한 멘트가 더 붙진 않았어도 임영웅을 향한 애정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이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 콘서트 티켓을 예매해드리지 못해 죄송했는데, 임영웅 콘서트는 꼭 보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아버지는 지난 4월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19 폐렴 탓이다. 아버지가 자주 보던 저녁 뉴스 안에 있던 일이 현실이 됐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19가 유행했을 때도 크게 실감을 하지 않았던 그 병이 순식간에 가족을 덮쳤다. 지금도 무심코 소파 한 자리를 볼 때면 아버지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주인을 잃게 된 차는 덩그러니 남게 됐다. 40년 동반자를 잃은 어머니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간판 일을 이어가기로 했다. 차는 이제 주로 어머니가 운전한다. 장례를 치르고 가까스로 일상에 복귀했을 때 시동 소리와 함께 나오던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헛헛한 차 안 공기를 채우는 건 소식을 늘어놓기만하는 무미건조한 라디오 뉴스였다.


 애써 이유를 묻지 않았다. 동반자를 잃은 어머니의 마음이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도 전해졌다. 고된 삶의 여정을 공유했던 동반자를 떠나보낸 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깊이는 자식 입장에서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함께 일하며 웃고, 다투면서 가정을 일궜던 현장에는 털털거리는 차처럼 어머니만 남게 됐다.


 하루 살기 바빠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 임영웅의 노래가 부모님에게 위로가 된 건 아닐까. 어머니에겐 가슴에 사무치게도, 남편과 출퇴근할 때 매번 들었던 노래가 임영웅이 부른 '배신자'였다. 남편을 떠나 보낸 후 홀로 차의 시동을 걸었을 때 핸들만 꼭 붙여잡고 있었을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후벼팠으리라.


 몇 달이 지날 때쯤 가게 문을 열자 임영웅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작업을 하시면서 임영웅의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일을 하는 중이었다. 짧은 순간 그 공간에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한 켠으로는 조금씩 어머니도 일상을 찾아가는구나 싶었다.


 "엄마, 임영웅이 다른 가수들하고 어떤 점이 그렇게 달라?" 저녁에 여전히, 하지만 이제는 홀로 트로트 가수가 출연하는 방송을 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임영웅 노래는 가슴을 울리더라. 눈물이 나." '가슴을 울린다'는 말속에는 이제는 배신자가 된 동반자를 향한 그리움도 짙게 배어있었다.


 막바지 무더위가 끓어오르던 지난 8월 임영웅의 서울 콘서트가 열렸다. 왠지 모를 씁쓸한 감정이 요동쳤다.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던 콘서트가 다시 열릴 무렵 가족을 남기도 홀연히 떠난, 얄미운 남편이자 아버지. 누군가에겐 한 명의 가수, 그리고 한 노래가 인생의 한 순간을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갑자기 아버지와 이별하게 된 우리 가족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임영웅과 그 사연들이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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