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코로나19로 중환자실에 입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버지도 살다 보니 중환자실에 갈 일도 있네.' 가족들 모두가 그렇게 나중에 이야깃거리가 생겼다고 할 에피소드였다. 아버지도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셀카로 찍어 가족 단톡 방에 보내며 '살이 빠졌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살이 빠져서 걱정이 된다는 게 아니라 다이어트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 뒤로 한 달이 지난 4월 26일. 심정지가 세 번째로 온 날 아버지는 무심하게 세상을 떠났다. 중환자실에 있던 한 달이라는 시간 중에 큰 이상이 없었던 처음 일주일을 제외하고, 아버지는 독한 약물치료 때문에 수면제를 맞고 항상 잠들어 계셨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드라마에서 보던 그 흔한 유언조차 남길 새도 없이 약에 취해 가족들 이름 한 번 불러보질 못하셨다. 평소에도 대화가 없던 아버지와 아들이었는데, 작별을 하면서도 인사조차 나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생일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코로나19에 확진됐다. 아침마다 나가던 동네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확진자가 나와서 전염이 되신 듯했다. 아버지는 확진 첫날에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가게에서 홀로 주무셨다. 나머지 격리 기간에는 방 안에서 홀로 지내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식사를 하셨다. 하필 코로나19 확진 때 맞았던 생일에 어머니, 동생과 함께 거실에서 케이크에 초를 꽂아놓고 아버지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드렸다. 스마트폰 액정 너머로 케이크를 보며 아버지가 방긋 웃으셨고, 곧 방 안에서도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또한 큰 탈 없이 지내왔던 가족들의 특별한 에피소드가 되는 듯했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 12시에 드디어 아버지의 코로나19 격리가 해제됐다. 혹여 전파 가능성이 있을까 싶어 자가 키트 검사를 하신 후 거실 밖으로 나오셨다. 격리기간 내내 후유증 한 번 겪질 않으셔서 코로나19가 아무렇지도 않게, 감기처럼 왔다가는 줄로만 알았다.
일상으로 복귀한 아버지는 밀린 일을 하시면서도 뉴스는 꼭 챙겨보셨다. 새로 당선된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 중이라는 이야기들…. 코로나19에 걸리기 전에도 "확진세가 좀 잠잠해져야 하는데"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 장례를 치를 공간이 부족하다는 소식 또한 뉴스 건너에 있는, 아주 멀리 있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틀이 채 지났을까. 코로나19 격리 탓에 밀린 업무를 하시던 아버지가 부쩍 힘들어하셨다. 눈이 침침하고, 숨 쉬기가 힘들다며 일을 하시다가 잠시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고 계셨다. 어머니가 같이 병원에 가자는 성화에도 그저 "왜 이러지. 이상하다"라는 말만 반복하신 채 다시 일을 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침대에서 숨쉬기가 힘들어 일어날 수 없어서 응급차를 불러서 병원에 왔어. 진료받으려면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네. 검사받고 계속 기다리고 있어." 결국 그날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고, 그다음 날이 돼서야 음성 판정을 받고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검사 결과는 코로나 폐렴이었다. 생각보다 폐렴이 심해서 일단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 병동 중에 중환자실에 자리가 겨우 하나 있어서 입원할 수 있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의 상태는 쉽게 정상으로 돌아오질 못했다. 입원 후 며칠은 괜찮았다가 호흡을 도와주는 호흡기를 달았다. 담당의사는 곧 상태가 좋아지면 호흡기를 떼고 약물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복세는 더뎠다. 어머니와 함께 예상치도 못한 의사 면담을 해야 했다.
"환자분이 코로나로 입원하신 분들 중에서는 그래도 나이가 젊으신 편이어서 회복 가능성이 높긴 한데, 그래도 확률은 반반이에요. 이 상태에서 좋아지면 일반 병실로 가시고, 안 좋아지시면…." 돌이켜 보면 그제야 뉴스에서만 보던 코로나19가 가족들의 인생에 성큼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았다. 반반이라는 확률은 정말 높지 않은 확률인데도 지레 의사들이 겁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우리 남편 꼭 살려주세요." 어머니는 어느새 뚝뚝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클리셰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뻔하디 뻔한 장면들. 현실감이 없었고, 그래서 눈물도 나질 않았다. "면회라도 할 수 있을까요." 코로나19로 인해 아버지가 입원한 후 중환자실은 면회가 전혀 되지 않았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면회도 승낙이 되어 어머니와 코로나 검사를 받고 하루가 지난 후에 면회를 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걸까.
면회자 명단을 작성하고, 방역복 장갑 등을 낀 채 일주일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기도까지 닿아있는 호흡기 호스는 아버지의 폐를 대신해 호흡 중이었고, 수면제로 잠든 아버지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무의식 중에 호흡기를 빼면 안 되기에 두 손은 병상 양쪽에 헝겊으로 묶여 있었다. 인공호흡기의 호흡에 따라 헐떡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그때가 돼서야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어린애가 된 것처럼 울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상상하지 못할 모습으로 혼자 힘겹게 숨을 버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평생 같이 사셨던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우리 왔어. 빨리 집에 가야지." 이미 얼굴이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어머니는 아버지의 눈을 두 손가락으로 벌리기도 하고, 얼굴을 쓰다듬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까스로 깨어나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난 되도록 울음을 내뱉지 않고 삼키며 한없이 아버지의 발만 매만졌다.
어머니는 그 후 하루에 한 번씩 중환자실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중환자실 의사, 간호사들은 아버지의 상태가 그대로라는 말만 반복했다. 크게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기간들이 길어졌다. 그 사이에 나 또한 코로나에 걸려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다음 면회는 어머니 홀로 면회를 했다. "코로나로 중환자실 오신 분들 중에 10%만 나가셨어요." 중환자실에서 근무 중이었던 레지던트가 말했다고 어머니가 전했다. '남의 일이라고 참 쉽게 말하는구나' 싶었다. 화가 나서 곧장 병원에 가서 레지던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진 못했다. 그보단 그 레지던트도 조금이라도 더 아버지에게 신경 써줬으면 했다. "그래도 아빠가 내가 말하는 거에 고개도 끄덕이고, 이전보단 좋아진 거 같아." 어머니는 아버지 상태가 호전된 것 같다고 했다.
담당 의사와 세 번째 면담을 했다. "환자분 상태가 그대로여서 호흡기를 뗄 수가 없네요. 입원하신 지 한 달 가까이 되셨으니 입을 통해 호흡기를 하는 것보단 목에 구멍을 내서 곧바로 호흡기를 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기도 부분에 구멍을 내고 호흡기를 삽입해야 한다는 말에 극구 반대하셨다. 30대 중반에 돌아가신 막내 고모가 때문이었다. 막내 고모는 기도암에 걸리셔서 목에 구멍을 꿇고 몇 년 간을 지내야 했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고, 가래가 끼어 세척을 하며 치료를 받던 막내 고모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목에 구멍을 내도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어머니는 추후 진행될 수 있는 수술에 보호자 사인을 했다. 그날 면회 때에는 아버지의 수염은 더 덥수룩해졌고, 숨은 더 가팔라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쉬는 한 숨이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오가는 움직임이라는 걸 그날 처음 깨달았다.
"빨리 병원으로 와. 아빠가 심정지가 왔대."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까. 전화 너머로 어머니는 말이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울음과 목소리가 뒤섞여있었다. 통화를 끊자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이 쏟아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쉬지 않고 눈물이 났다. 중환자실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의자에 앉아 계셨다. "아빠가 다시 심장이 뛰어서 안정을 취하고 있대." 어머니는 기진맥진해 보였다. "담당 의사가 돌아가실 수 있다고 해서 자식들도 부르라고 했다고 하더라." 반반이라는 확률도, 10%라는 확률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날 만난 아버지는 이전과는 달랐다. 심정지가 와서 일까. 체온은 급격히 떨어진 상태였고,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병상 옆에는 심장제새동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아직 말도 못 해봤는데….' 단 한 번 만이라도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이틀 뒤 두 번째 심정지가 왔다.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가 되자 가족들은 전화기 벨소리 같은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한밤에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언제 병원에서 전화가 올지 몰라서였다. 이때부터 병원에 급한 전화는 나에게만 해달라고 요청했다.
"심정지가 왔어요. 빨리 가족들하고 같이 오세요." 아버지가 세 번째 심정지가 왔을 때 전화를 받은 건 나였다. 되도록 꾹 울음을 누르고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30분 동안 심폐소생술 중인데 돌아오질 않으시네요." 두 번째 심정지 이후 담당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동안도 너무 고생했는데, 더 고생하는 거 보기가 싫다." 어머니는 우시면서도 이제는 아버지를 보내주자고 했고, 나도 동의했다. 40년 가까이 함께 했던 동반자가 호흡기에 기댄 채 헐떡이는 걸 어머니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셨다. 잠시 후 출근했던 동생이 도착하자 의사의 입회 아래에 아버지의 사망 선고가 진행됐다. 아버지에게 "고생했어"라는 말을 가장 먼저 했다. "먼저 가서 편히 쉬고 있어. 셋이 잘 살고 있을게 나중에 만나." 그렇게 마지막을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한 달 동안 꿈결을 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통 아버지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고,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됐다. 말수가 별로 없는 부자지간에 평소에 더 많이 대화를 할 걸 싶었다.
지역 활동을 많이 하셨던 아버지는 지난해 겨울쯤에 사회단체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 옆에 있어서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들을 순 있었다. 마지막 질문은 자신이 살면서 자부할 수 있는 것과 앞으로 소망하는 것이었다. "크게 이룬 건 없지만,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왔어요. 먼저 가신 부모, 형제들 나중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곱씹을수록 참 아버지다운 말이었고, 그렇게 사셨던 것 같다. 그러니 남은 세 식구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조금씩 채우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네 가족이 다시 만날 때까지 올곧게 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