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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Apr 20. 2020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떠나는 이든, 남는 이든 모두 용기가 필요해

 "커피나 한 잔 하자. 어떤 거 마실래? 따뜻한 거? 아이스?"

 "아, 제가 커피 뽑으러 가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뽑아갈게. 어떤 거?"

 "아이스커피 부탁드려요."


 아침 업무를 끝낸 후 잠시 화장실에 가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에는 팀장님의 이름이 떴다. 전화를 받으니 팀장님은 식당에서 커피를 뽑아서 오신다고 했다. 무뚝뚝해 보였던 팀장님이 손수 커피까지 뽑아온다고 하니 괜스레 머쓱했다.


 "언제까지 근무하면 되는 거지?"

 "급하지 않으니 한 달 더 다녀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럼. 5월 말까지 출근하고, 6월에는 남은 연차 쓰는 걸로 하자."

 "네."


 고민 끝에 팀장님에게 퇴사 얘기를 꺼냈다. 지난가을부터 고민하던 '퇴사'라는 말을 회사에서 처음 내뱉었다. 몇 달이나 혼자 끙끙대며 생각하던 단어는 단 몇 초만에 상대에게 옮겨갔다. '이렇게 쉬운 거였나' 싶었다.




 팀장님에게 곧바로 퇴사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다. 먼저 직속 선배와 얘기를 나눴다. 퇴사를 하더라도 회사의 절차는 어기고 싶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조직생활이 다 그렇듯이 지켜야 하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갑자기 퇴사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오래 고민하던 건데 마침 회사도 바쁜 시기가 아니어서 지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다른 회사로 이직하려고?"

 "이직보다는 다른 일을 좀 해보고 싶어서요. 작년부터 고민하던 거라…."


 선배에게 전달한 퇴사 의사는 예상보다 짧게 마무리됐다. "나도 선배들이 잡아도 나오게 되더라. 많이 고민했을 텐데…." 선배는 잠시 퇴사를 만류하기는 했어도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지난주에 팀장님에게 "다른 일을 좀 해보고 싶다"고 언질한 게 선배에게도 전해졌을까. 그래도 깔끔하게 끝난 대화는 게운치 않았다.


 선배는 곧이어 팀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도 짧았다. 5분 만에 끝난 대화였다. 팀장님과 선배는 다시 자리로 들어왔다. 내 컴퓨터 메신저에 팀장님과의 대화창이 떴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친척 도와서 장사를 해볼까 해서요.'

 '무슨 장사?'

 '큰 이모가 공장을 하시는데 도와드리면서 유통 쪽을 배우려고요.'

 '괜찮네. 대책 없이 나가면 말리려고 했는데 다 생각이 있었구먼.'


 이전 두 회사에서 퇴사를 할 때와 전혀 다른 전개였다. 지난해 회사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직원과 그의 퇴사에 대해 말하는 팀장의 대화였다.

 



 '퇴사'라는 말을 처음 꺼낸 그날, 팀장님과 단 둘이 술 한잔을 했다. 팀장님과는 지금 회사를 함께 다니기 전부터 알던 선후배였다. 입사 후 듣게 된 이야기였는데 나를 이 회사에 추천한 것도 먼저 입사한 팀장님이었다. 그렇기에 팀장님이 퇴사를 극구 말리지 않은 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심 퇴사하는 걸 말리기라도 바랐던 걸까.

 

 "부럽네. 다른 일 하고 싶다고 할 때는 몰랐는데 믿는 구석이 있었구먼."

 "다시 밑바닥부터 배우고 고생해야죠."

 "네가 자리 잡으면 나도 좀 불러줘라."


 술기운에 이야기를 주고받자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듣게 됐다. 팀장님도 윗선에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다른 팀의 견제와 업무 스트레스 속에서 내색하지 않고 말없이 버티고 있었다. 나와 팀장님은 힘들어도 별로 티를 내지 않았다. 같이 담배 한 대를 펴도 서로 '힘들다'고 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잘 준비해서 해봐. 아이템 괜찮다."

 "네. 어떻게든 잘해봐야죠."


 회식 자리가 몇 달 동안 없다가 오랜만에 갖은 팀장님, 아니 선배와의 자리였다.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붙잡은들 붙잡히지 않을 사람이고, 떠나고 싶은들 어떻게든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둘 다 그동안 여러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했고, 떠나기도 했다. 직장생활의 생리가 그랬다. 




 "청년창업 지원금 그런 것도 있다던데. 내 친구가 말해주더라."

 "그런 것도 있어요?"

 "응. 그렇대. 사업계획서 잘 쓰면 된다고는 하는데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잘 찾아봐."


 떠나는 후배와 남는 선배의 점심시간 대화였다. 누군가 봤다면 이상한 대화였을 테다. 두 사람에게는 그저 자신의 길을 걷고, 다른 길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남아 있는 동안에는 잘해야 된다."

 "그럼요."

 "그 사이에 생각 바뀌면 언제든 말하고."

 "네."


 퇴사까지는 40일 남았다. 그 기간 동안에는 더 일을 잘해야 하고, 실수도 없어야 할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팀장님을 위해서도…. 퇴사 이후 일들도 틈틈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떠나는 이든, 남는 이든 모두 용기가 필요하다. 팀장님과 대화하던 중간에 문뜩 드라마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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