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깨뜨린 사람들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

by INA

'계엄령 놀이' 사건의 고발자에 대한 영상을 보며

영화 <더 휘슬블로어(The Whistleblower, 2010)>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 겹쳐 올라왔다.


실화에 기반한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UN 파견 경찰로 보스니아에서 근무하던 중, 평화유지군과 국제 경찰들이 인신매매와 성폭력, 미성년자 착취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내부 고발을 선택하지만, 돌아온 것은 보호가 아니라 계약 해지였다.


사회는 정의를 칭송하지만, 정의를 실행한 사람을 보호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내부고발자는 정의의 승자가 아니라,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희생되는 사람이 된다.


문제를 제거할 것인가,

문제를 말한 사람을 제거할 것인가.

조직은 거의 후자를 택한다.


조직이 싫어지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조직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이 점점 낯설어진다.


조직에는 서열이 생긴다. 역할과 책임을 나누기 위해 필요한 구조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순간은 그 서열에 존재의 가치가 덧씌워질 때다.

직급이 인격이 되고, 위치가 인간의 값어치를 결정하는 세계.

그 안에서 사람은 숫자와 등급으로 환원된다.


서열은 관리의 도구여야 하지만, 종종 불안을 숨기는 장치가 된다.

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권한을 쥐면, 질문은 공격으로 오인되고 침묵은 미덕으로 포장된다.

그렇게 조직은 유지되지만, 인간다움은 조금씩 닳아간다.


나는 가끔 예수를 떠올린다. 그는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제도도, 서열도 세우지 않았다.

대신 제자들과 함께 작은 공동체의 형태로 다니며 말했고, 관계 속에서 설득했다.

위계가 아니라 각성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


그가 조직화를 원했다면 능히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직은 관리로, 관리는 서열로, 서열은 결국 인간을 수단으로 바꾸기 쉽다는 사실을.


내부고발자는 언제나 손가락질받는다.

만약 그 조직 안의 다수가 같은 양심을 공유하고 있었다면, 문제는 훨씬 이전에 드러났을 것이다.

고발자가 미움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문제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선택한 침묵을 깨뜨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타인의 방관을 드러낸다.


영화 〈더 휘슬블로어〉에서 한 단어가 오래 남았다.

Humanity.


그녀는 정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체제를 바꾸자고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자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은 조직에 가장 위험한 언어였다.

인간다움은 서열보다 앞에 있고, 조직 논리보다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은 유지되기 위해 순응하는 인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다움은 부품화를 거부한다.

그래서 조직은 인간다움을 불편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각성하여,

조직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기를.


자신이 지닌 인간다움,

말투와 태도, 침묵하지 않는 선택을 드러내어

누군가의 포기를 막는 사람들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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