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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남은에어팟 May 08. 2019

3.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면서요"

삼 일일 글

갓 태어난 아이들 중에 예쁘지 않은 아이가 없다. 


말을 한마디 시작했을 때, 한걸음 처음 내딛었을 때, 그보다도 더 먼저는 웃어주기만 해도 세상의 빛이 다 모이는 느낌이다. 특히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입장에서 보면 더더욱 놀랍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이 평화와 사랑의 아이는 두 가지 선택권을 가진다. 공부를 잘해서 가정의 평화를 지키거나 잘하지 못해서 골칫덩어리가 되거나.




어렸을 적에 나는 응급실에 자주 가는 아이였다. 첫 아이였던 만큼 엄마와 아빠는 놀라서 응급실로 새벽마다 출근도장을 찍었다고 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차도 없었는데 그러면 새벽에 염치 불고하고 옆집에 직장 상사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고 했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정말 싫어하는 부모님 성격에, 새벽에 후배도 아니고 선배 집 대문을 두드리거나 집전화로 전화를 거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었기에 그랬던 거 아닐까. 


엄마 아빠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정말 그랬을 거다. 건강하게만 자라라. 별 탈 없이만 있어줘. 



중학교 고등학교가 될수록 이제는 그때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졌지만, 그때만큼의 사랑과 칭찬을 받지 못한다. 나는 혼자 이제 슈퍼에 가서 우유도 사 올 수 있고 집에 혼자 있으면서 밥도 챙겨 먹을 줄 알고 심지어 혼자서 학원도 갈 수 있다. 그렇지만 칭찬은 없다. 으레 당연하다는 듯이-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교육관은 '방목'이었다. 공부를 잘하던지 못하던지 너 인생이다.라는 태도셨고 실제로 성적표를 보는 일도 없었다. 기억에 고등학교 내내 성적표 한번 보여드린 적이 없다. 그리고 그에 맞게 공부를 잘하던지 못하던지 별말을 안 하셨다. (근데 아이러니하게 쓸데없이 나는 엄청 잘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혼나던 것들은, 찢어진 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거. 후줄근한 옷에 뭘 묻히고 다니는 거. 집에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오는 것들 정도였다. 



이런 집에서 자라난 건 행운이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의 집은 그렇지 못했다.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고 아이들은 항상 부채감에 시달린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나 같은 경우엔 경쟁심의 발로 였다. 경쟁에 참여해서 승리하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상 공부 자체도 그렇게 어렵거나 싫지 않았고.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의 진짜 공부하는 이유는 부모님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서이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랄까. 엄마 혹은 아빠가 화를 내는 날은 그 공기가 다르다. 차갑다고 할까 날카롭다고 할까 아니면 밀도가 조금 짙어진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보답, 그리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삶은 나쁘진 않지만 전혀 행복할 수 없다. 그리고 아이들의 정신에 뼈저리게 박힌다. 부모님이란 존재는 혼내거나 눈치를 봐야 하거나 괴롭히는 어떤 존재라고 말이다.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는지 나는 짐작할 방도도 없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그 사랑의 크기만큼 미래를 걱정하고, 공부를 잘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어쩌면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되는 아들이든 딸이 어디 나가서 맞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듯이, 공부도 잘해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전후세대와 같이 이전 세대와 달리 모두가 입시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입시가 주는 스트레스 속에서 그리고 그 경쟁 속에서 괴로워하던 세대가 아닌가. 공감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신의 아이가 대학을 이상한 데로 간다 한들, 공부를 잘 못해서 뒤쳐진다 한들, 인생은 흘러가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고등학교 시기에 부모와 틀어진 아이의 삶은 좋은 대학을 못 간 삶보다 더 처절하고 더 괴롭다. 

 

과외나 학원에서 아이들을 만나서 너무 애정을 갖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시험을 준비시키면, 

시험 당일날 그렇게 떨린다. 내가 시험 보는 것보다 더.


그리고 시험을 망쳐오거나 실수를 해서 돌아오면 너무 화가 난다. 부모님 마음은 더더 그렇겠기에 사실 내가 위에 적은 말들이 그저 말뿐이고 실제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맞다. 그렇지만 아이들에 비해서 조금 더 살아본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좋은 대학을 못 나온 아이와 부모와 연을 끊거나 사이가 평생 어색한 아이. 당신의 아이는 어떤 아이가 되길 바라는가. 



어렸을 적 아이가 아파서 발을 동동 구르던 엄마의 마음을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겠지만.

대학이라는 제도와 사회라는 제도의 틀에서 아이가 얼마나 적응하는가를 측정하고 질타하기보다는

그 존재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살면서 내가 이토록 공들이고 사랑하고 신경 써본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 존재의 단 한 번뿐인 학창 시절을 괴롭게 만들지 말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가진 아이는 대학보다 더 큰 것들을 가지고 사회로 나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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