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호기롭게 한국 대학생의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는 걸 상상했던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새내기 신입생은, 아주 진탕 술을 마셔볼 준비가 되어있었고, 활발한 나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금세 만들어 매일 같이 놀러 다닐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나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었던 걸까, 몇 번 내민 손이 잡히지 않았음을 느끼기 시작할 땐 이미 조금씩 내 안에서도, 일본 친구들과도 마음의 벽이 쌓여가고 있었고,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언어와 국적의 장벽이었다.
또 다른 하나의 장벽은 ‘돈’ 이였다.
일본에 처음 왔었던 1, 2학년의 나의 생활은 정말 신기하게도 궁핍했다.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다. 다들 이렇게, 원래 대학생들은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월세 3만 7천 엔과 필요할 때마다 가끔씩 받는 용돈이 전부여서, 먹고 싶은 것을 내 안에서 제한해 가면서 나름대로의 룰을 정해서 용돈을 잘 쪼개서 썼었다.
언어, 국적의 장벽과 돈의 문제는 대학생활에 큰 제한이 있었고, 하루 저녁 900엔이 넘는 저녁은 나에겐 한 달의 계획이 다 틀어지는 일이었다. (당시 대학 학식이 300-400엔 정도, 집 근처 외식 700-800엔 선에서 먹을 수 있었다)
그럼 알바를 하면 되지 않겠냐 싶겠지만, 대학교 1학년, 학교도 적응하기 힘든 시기에 감히 나를 새로운 환경에 던질 용가 없었다..
나의 최선은 아껴 쓰고 아껴먹으며 성적을 잘 받아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추가로, 미술대학에서 학점을 수료하기 위해 필요한 작품제작에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돈이 필요했다.
학비를 그렇게 내는데, 작업하는데도 돈이 필요하다니.
무슨 단체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벽에 붙일 기본 재료, 테이프 하나가 800엔이냐..
집 전기세를 아끼려고 학교에만 있었고, 물은 한 방울이라도 아끼려고 수도꼭지는 최대한 세게 잠갔다.
치약이 떨어지면 언제 이렇게 치약을 빨리 썼는지.. 라며 아껴서 사용하지 못한 나를 되돌아보곤 했다.
나에게는 한국인 커뮤니티가 유일한 오아시스였지만,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볼링, 노래방, 스시, 오티, 술자리, 집에서 하는 파티도 돈 계산하면서 골라서 갔고, 공짜 혹은 돈을 적게 낼 수 있는 곳에만 참석했다. 지금생각하면 무슨 그렇게 쪼잔하게 사냐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땐 그렇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됐다.
그렇게 쪼개가면서 짠내 나게 살았던 나의 1학년 1학기 첫 과제가 끝나고, 처음으로 같이 과제를 한 친구들과 打ち上げ(과제 뒤풀이)를 하기로 했고, 그때 나는 큰 다짐을 해 참석한 이벤트가 내 안에서 그때 이후로 당분간 일본 친구들에게 마음의 문을 꽝 닫은 사건이 일어났다.
같이 그룹 작업한 친구네 자취방에서 타코야키 파티를 하기고 했고,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일본인 친구들, 그리고 내 최애 음식인 떡볶이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친구들에게 꼭 한번 먹여주고 싶었고, 매운 것을 못 먹는 친구들에게 짜장떡볶이라는 메뉴를 처음으로 만들어보기로 다짐했다. 물론, 먹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내가 만들어가겠다 했으니 돈은 받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솔직히, 양념 조금 추가 한 짜장면에 떡이랑 야채를 넣은 매우 간단한 요리였지만 나에게는 아주 큰 시도였다.
짜장떡볶이는 처음이었고, 한국산 떡볶이 떡과 짜파게티는 주변 마트에서 팔지 않았다. 요즘처럼 일본 마트에 자연스럽게 한국음식이 녹아들어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신오오쿠보에 가서 재료를 구매했고
(왕복 교통비 -2000엔, 재료비 -3000엔) 총 5000엔, 내 일주일식비를 지출했다. 매우 설레는 마음을 안고 처음 시도해 본 떡볶이는 매우 성곡적이었고, 한국떡을 대파처럼 생겼다고 하는 친구들이 매우 신기했고 맛있게 먹어줘서 뿌듯했다.
순조롭게 뒤풀이가 끝나고 다 같이 정산을 했다.
정산 방식은 이랬다. 나도 처음이었어서 원래 이런 건 줄 알았다. 각자 재료를 하나씩 사 왔다. 이를테면 간장, 양배추, 문어.. 등등 10명이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일단 장소를 빌려준 친구 1은 계산에서 빠졌다.
요리를 만들어온 나도 빼 줄줄 알았는데 내가 말하기는 웃기니까 가만히 있었다. ( 다들 맛있게 먹어줬잖아..)
그리고 계산하기 시작했다. 간장 280엔 나누기 9명
31엔씩 a에게. 문어 590엔 나누기 9.. 이런 식으로 계산하더니 1엔짜리 동전이 왔다 갔다 했고, 줬던 친구가 돈을 받고, 그 동전이 b에게 가고..
매우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 상황을 목격했을 땐 뭐랄까.. 너네들도 나랑 같은 생활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무리 내가 아껴가면서 살고 있다지만, 몇십 엔이 왔다 갔다 하는 정나미 하나도 없는 풍경..? 그리고 내가 만들어온 떡볶이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없는, 그렇다고 내가 말하기도 참 뭐 한.. 아주 애매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냥 그러고 몇 엔씩 친구들과 나눠갖고 집으로 향하면서 크게 현타가 왔다.
왜 눈물이 날까. 이 상황이 왜 싫으며, 기분이 안 좋을까..
일본의 특유의 이런 더치페이를 뛰어넘는 이 정 없는 계산법은 뭘까. 원래 이런 나라인 건가.. 라며 앞으로의 대학생활이 걱정됐다.
아기도 태어나면, 새로운 환경에 처음 접하고 배우면서 커나간다.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가 뿌리내려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은 이미 살고 있는 인생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룰이 있고, 그 모든 것이 ‘첫 경험’이라면 이곳의 룰 이겠거니, 받아들이며 습득해 나아간다.
여행도 똑같다. 아, 이 나라사람은 이렇구나라고 한 가지 상황만 경험해도 그 ‘첫 경험’은 아주 크게 기억에 남는다.
나에게의 ‘첫’ 대학생활의 ‘첫’ 뒤풀이, 그리고 ‘첫’ 정산은 이러했다.
사실, 그런 상황을 겪고 현재 10년째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그런 상황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계산 방식이었다.. 나의 ‘첫 경험’이 10년 동안 경험 할 수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었다니..! ( 정말 귀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기대를 안 하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나의 배품이 무조건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교훈을 얻었고, 그렇게 나도 점점 일본화가 되어갔다. 아무런 기대 없는 감정엔 예상치 못한 감동이 되어 돌아올 때도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