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직장에 출근해서 일을 한다. 출퇴근 시간을 지키는 것은 직장인의 기본 덕목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지옥철과 만원버스에서 한 줄기 콩나물이 되어 비비적거리고 튕겨나왔다가도 끼어들길 반복하며 아침마다 바삐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일까, 출퇴근에 지장을 겪는다는 건 매우 화가 나고 조바심이 나는 일로 여겨진다.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과 장애 예산 편성을 요구하며 서울 지하철 3, 4호선에서 승하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일터에 나가는 출퇴근 시간에 진행돼 큰 화제가 되었다. 많은 언론에서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직장을 다니는 시민들의 지각이 속출했다며 그 불편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전장연이 서울 시민의 출퇴근 시간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일갈했다. 시위를 비난하는 댓글들도 수없이 쏟아졌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도대체 왜 남의 출퇴근을 방해하느냐고 발끈하기 전에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 수없이 쏟아지는 뉴스들 속에는 의아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장애인과 시민을 별개의 존재로 서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장애인도 시민 아닌가. 장애인과 시민이라는 표현은 마치 장애인은 시민이 아닌 제3의 존재인 양 타자화하는 것 아닌가. 어떤 언론에서는 '일반 시민'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것도 좀 이상했다. 장애인은 일반적이지 않은 시민이라는 뜻인가?
언론의 용어 선택은 중요하다. 언어와 낱말은 사람의 의식 깊숙이 자리해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을 판가름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인과 시민을 별개의 존재로 구분짓기보다는 '장애 시민'과 '비장애 시민'이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모두 같은 시민이라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사실을 전제로 해야 이 상황을 더욱 잘 이해하고, 서로 연대할 여지도 생기기 때문이다.
비장애 시민과 장애 시민 모두 같은 시민임을 이해했다면 "시민들이 출퇴근길에 지장을 겪었다"라는 문장을 다시 살펴보자. 비장애 시민이 출퇴근을 하듯이, 장애 시민도 사회생활을 하는 주체적 존재다. 장애 시민이라고 꼭 시설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들도 사회생활을 하며, 비장애 시민과 같은 일상을 누리길 원하는 보통의 존재다. (보통의 잘못된 인식 전환을 위해서라도 탈시설은 꼭 필요하다)
장애 시민이 비장애 시민처럼 사회생활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았다면, 한 가지 전제를 해보려 한다. 만약 내가 출퇴근을 해야 하는데 버스와 지하철이 차단되어 있고 자가용도 택시도 이용할 수 없는데, 이러한 상황을 직장에서 용인해 주지도 않는다면 과연 어떨까? 일단 직장에서 잘릴 것이 두려워질 것이고 어떻게 돈을 벌어서 먹고 살 것인지 막막해질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하거나 정부에 "제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항의할 것이다.
그렇다. 이동권은 곧 생존권이다. 이동하지 못하면 직장생활을 하기가 어렵다. 학교에 갈 수 없으니 교육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아파도 제때 병원에 가기 어렵다. 그렇기에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장애가 벼슬이냐?"라며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대체 어떤 벼슬 가진 이가 자기 마음대로 학교를 못 가고, 직장도 못 가고, 병원도 제때 갈 수 없다는 것인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자는 왜 하필이면 출퇴근 시간를 택했냐며 시위 방식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한다. 안타깝게도 전장연이 출퇴근 시간에 시위를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주목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장애 시민들이 이동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 것이 어느덧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남들이 자연스레 누리는 기본 권리를 함께 갖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당연한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20년이 넘도록 외면당한 상황에서 대체 그들이 어떤 방법을 택할 수 있다는 걸까.
보다 나은 방식으로 이야기할 때 무관심했던 건 과연 누구인가?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결국 문제를 키웠다. 장애인 이동권에 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방법은 당사자들이 욕먹기를 자초하는 것이었다. 당사자들이 이렇게 절박한데, 시위를 하는 방식마저 다수의 비위에 맞추라는 건 지나치게 기득권적인 관점 아닐까.
이러한 사태에 관해 반성은커녕, 공기업과 일부 언론, 정치인은 혐오를 조장하는 데 앞장섰다. 한 시민이 "할머니 임종을 봐야 한다"고 외치자, 이형숙 서울시 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장이 "버스 타고 가세요"라고 말한 것만 유튜브 영상으로 편집되어 퍼졌다. 실제로 이형숙 협의회장은 뒤이어 "(저도) 그런 걸 당해 봤기 때문에 잘 압니다. 저도 그래서 임종을 못 봤거든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울먹이며 사과했지만, 서울교통공사는 이 부분을 편집으로 잘라냈다. 언론은 전후 맥락을 살피지도 않은 채 앞다퉈 보도했고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보란듯이 기사를 공유했다.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은 건 전장연이다.
물론 누군가는 왜 3, 4호선을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이 시위를 감당해야 하냐고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비장애 시민이 제때 출퇴근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장애 시민을 향한 분노와 비난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지 못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 예산을 제대로 편성하고 장애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서, 다시는 이런 시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다.
내 출퇴근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출퇴근도 중요하다. 장애 시민, 비장애 시민 모두에게 통용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껏 장애 시민들은 마음 편히 출퇴근할 권리를 갖지 못했는지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 왜 나라를 책임지는 국민의 머슴들은 시민이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데 소극적이었나. 왜 제대로 일하지 않아서 이런 사태를 야기했는가. 시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우선순위로 처리해야 할 일이다.
분노의 화살을 받아야 할 대상은 장애 시민이 아니라, 20여년간 직무태만에 빠진 정치인들이다. 어차피 다 같은 시민인데 장애 여부로 갈라치고 잘잘못을 따져봤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으며, 이 문제를 풀어야 할 정치인들의 책임 소재만 옅어진다. 어느 누군가는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기 때문인지 시민과 시민 간의 싸움을 대놓고 부추기고 있다. 이런 간악한 수법에 말려들어 같은 시민을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본질을 보아야 한다.
나는 2014년 독일 에센 지역에 일주일 간 머문 적이 있다. 그때 당시 거리와 대중교통, 식당, 카페 등 곳곳에 장애인이 정말 많이 있음을 느꼈다. 독일이 특별히 장애인이 많은 나라라는 뜻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장애 시민이 이동하는 데 제약이 적고 별다른 시선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밖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2022년에도 거리와 대중교통에서 장애 시민을 보기란 극히 드물다. 이동할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도 않고 따가운 시선을 받기 일쑤이니 밖에 잘 나오지 않게 된 것 아닌가. 우리 사회의 혐오와 편견이 장애 시민의 존재를 지운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장애 시민에게 "그렇게 몸이 불편하면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말한다. 도대체 여기서 더 얼마나 존재를 지우길 바라는 것인가. 코로나19에 걸렸던 수많은 이들이 7일간의 자택 격리가 답답하고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이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해서 대부분 집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현실은 어떤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외출한 사람에게 "왜 나왔냐"라며 혐오하는 것은 단단히 잘못된 처사다.
어떤 이들은 장애 시민의 80% 이상이 후천적 장애인이며 현재 급속하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한다면 추후 비장애 시민들도 다치거나 나이가 들었을 때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타당하지만, 그렇게 설득을 이끌어내야만 하는 사회는 좀 답답하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만인데, 구태여 '혹시 나중에 당신이 그런 입장이 될지도 모르니까'라는 전제를 깔아야만 겨우 설득이 되는 이기적인 사회라면 너무 '비문명적인' 것 아닌가 싶다. 장애 시민도, 비장애 시민도 모두 함께 출퇴근에 손해를 입지 않는 방법을 깊이 논의하고 연대하는 것이 진짜 '문명적인' 사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