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라! 인턴부터 사장까지
2015년,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모바일 게임이 있었다. 바로 <내 꿈은 정규직!>이라는 게임으로,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주인공 캐릭터를 인턴(신입사원)부터 키워서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온갖 이유로 갑자기 퇴직을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만큼 악명 높은 난이도를 자랑했다. 사장까지 승진한 후 자진 퇴사하는 엔딩을 본 유저는 극히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게임은 취업준비생과 직장인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해 큰 이슈가 되었다. 실제로 이 게임의 개발자가 세 번째 회사에서 퇴직을 당하고 난 뒤 이 게임을 만들었다고 하니, 현실을 반영한 게임이 맞겠다.
이 게임이 한창 인기를 끌 때 나도 다운로드를 받았다. 그렇지만 플레이하지는 않았다. 과거에 겪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9년 가량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턴이나 수습도 거쳤고 몇 차례 이직도 했는데, 그 중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해고를 당했던 적이 두 번 있다.
첫 직장이 될 뻔했던 그 곳
맨 처음 해고를 당했던 회사는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딛었던 곳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 4학년 2학기 학생이었고, 취업을 위해 여러 회사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그러다가 한 회사에 인턴으로 합격했다. 인턴으로 입사하면 2개월 간 교육과 심사를 거쳐 정규직 전환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학기 도중에 수업을 포기하고 회사를 다녀야 하는 것이 고민됐지만, 워낙 취업난으로 떠들썩한 시기였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강 신청한 강의들은 교수님들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회사에 들어갔다.
인턴으로 출근한 첫째 날, 교육 시간에 한 임원이 정규직 전환 과정을 설명해 줬다. 그는 "회사에서 정해놓은 정규직 전환의 비율은 50%다"라고 말했다. 여기 있는 인원들 중 절반은 탈락한다는 뜻이겠지. 숨이 막히던 찰나에 임원은 이런 조건을 덧붙였다. 작년에 인턴 생활을 했던 윗 기수 선배들은 '말을 잘 들어서' 100%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었다고 했다. 이처럼 모든 임직원이 너희 기수가 어떻게 일하고 행동하는지 지켜볼 것이고, 너희가 잘만 한다면 정규직 전환 비율을 조정해 주겠다고 했다.
만약 현실에 조금만 눈을 일찍 떴다면 이 이야기가 실제로는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회초년생을 배려하거나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닌, 정규직 전환을 볼모로 잡고 인턴에게 갑질을 하는 것이었다. 작년 기수 인턴들을 예상보다 더 많이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면, 애초에 다음 기수에서는 TO를 많이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회사 사정상 이번 기수의 정규직 전환이 치열할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인턴들의 책임으로 떠넘기기 위해 밑밥을 까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이었던 나는 사회의 냉혹함을 잘은 몰랐고, 앳된 얼굴을 한 다른 동기들도 상당수 이 이야기를 순진하게 받아들였다. 사회초년생이었으니까 정말로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던 것이다. 회사에서는 인턴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하고, 각 팀의 실무에 투입하기도 했다. 당시 2주 간격으로 팀을 바꿔가며 다양한 직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여러 팀을 전전하면서 잘 맞지 않는다고 느낀 곳도 있었지만,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던 선배들도 있었다. 성함은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여자 선배가 한 분 있을 정도다.
회사의 권력자들은 하루살이에게 눈칫밥을 주며 웃지
제 아무리 사회초년생이라 할지언정 시간이 지나자 회사 내의 모순이 차츰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회사는 자율복장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인턴은 정장 차림이 기본이었다. 그렇지만 금요일만큼은 인턴들도 자율복장을 하라며 풀어주었다. 자율복장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관해 묻자 "그 정도는 알아서 판단해라"며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입어야 하지? 자율복장이라고 진짜 자유롭게 입었다가는 찍힐 것 같은데? 동기들은 술렁였다. 결국 '정장도 자율복장의 일부'라는 생각에 첫째 주 금요일에는 많은 동기들이 정장 차림으로 출근했다. 그러자 "왜 자율복장인데 정장을 입었느냐? 금요일에는 정장을 입지 마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시 금요일이 돌아오자 동기들은 고민을 했다. 평소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대리, 팀장들이 많았고, 임원 중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는 이도 있었다. 이런 모습에 착안한 동기들은 흰 블라우스에 얌전한 디자인의 청바지를 매칭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인턴인데 청바지를 입는 건 너무 간 것 아니냐?"라는 타박이 돌아왔다. 그럼 대체 어떻게 입으라는 걸까? 인사팀에서는 "면바지를 입으면 된다"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비즈니스 캐주얼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던 사회초년생의 에피소드라 치고 넘어가겠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한 임원은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인턴에게 "넌 너무 나이가 많다", "나이 서른에 뭘 하다가 이제와서 겨우 인턴을 하느냐"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남직원의 나이가 서른 살인 것이 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애초에 나이로 차별을 해서도 안 되지만, 이 말을 하는 당신 나이는요?라는 반발심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
임원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이제까지 과제 올린 것 봤는데, 전반적으로 남자애들 능력이 떨어진다. 애초에 남자애들은 면접 때 안 봐줬으면 여기 있지도 않았을 거다. 너희 바로 윗 기수가 하필이면 전부 여자라서 성비 맞추려고~"라고 말했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일 뿐더러, 심지어 이런 일화를 인턴 길들이기용 협박으로 삼는다니?
어떤 상사는 충고랍시고 "혹시라도 너희끼리 따로 모이지 마라. 누구누구 모였는지 다 체크해 놓을 거야. 아니면 요령껏 들키지 말고"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대체 왜 인턴들은 동기끼리 모여서는 안 된다는 걸까? 회사에 관한 뒷담을 쏟아낼까 봐 그런 걸까?
그렇지만 회사에 대한 불신이 쌓일 대로 쌓인 만큼, 한 번은 동기끼리 몰래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물론 회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술집을 택했다. 술집에서 한참 동안 동기들을 기다렸지만 제시간에 전부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야근하지 않는 날이 드물었고, 혹시라도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따로따로 퇴근하고 몰래 모여야 했기 때문이다.
야근을 해야 하는 이유도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회사의 사업 부문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회사를 먹여살리는 건 기존 사업 부문이었다. 신사업 부문은 말 그대로 신규 사업이었기 때문에 매출이나 실적이 거의 나지 않았다. 팀장들은 기존 사업 부문이 회사 매출을 책임지느라 야근을 많이 한다며, 신사업 부문 직원들은 정시 퇴근하지 말고 눈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해당 사업 부문에 인원을 더 많이 뽑아서 업무 부담을 줄여주는 게 합리적인 해결 방법 아닐까? 왜 기존 사업 부문은 과도한 업무량에 치여 야근을 해야 하고, 신사업 부문은 눈칫밥을 먹으며 회사에 남아야 하는 걸까?
인턴 생활에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도 정규직 전환 날짜가 다가오는 것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대략 일주일이 남은 시점에는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 남자들은 다 붙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한 여자 팀장은 어떤 남자 인턴을 두고 "OO이, 넌 내가 찍었어"라고 대놓고 말하며 눈을 찡긋했다. 그 인턴을 자기 팀으로 데려오겠다고 이미 입김을 넣었다는 뜻이겠지. 그 팀장은 남자 인턴을 자기 팀으로 온 인턴들의 '반장'으로 삼은 대신, 나머지 인턴들에게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다. 나는 그 반장 인턴에게 물어가며 일처리를 해야 했다.
왜 꼭 사람을 그렇게 대했어야만 했나요
어느 날이었다. 보통 오전에는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업무를 했는데, 그날따라 오후 4시까지 교육이 이어졌다. 교육이 끝나고 업무를 하기 위해 올라가려는 찰나, "인턴들은 자기 자리에 있는 짐을 모두 싸서 강당으로 내려와라", "다시 위로 올라갈 일이 없도록 소지품을 모두 챙겨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올 것이 왔구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당장 서둘러서 짐을 갖고 내려오라며 닦달을 하는 바람에 함께 시간을 보내온 선배들, 팀장들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동기들은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로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인사팀에서는 한 명씩 상담을 통해 정규직 전환 여부를 알려 주겠다고 했다. 동기들은 회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카페에 모여 함께 결과를 이야기하기로 약속했다.
이윽고 내 이름도 호명되었다. 인사팀의 설명은 시원스럽지 못했지만 결과만큼은 확실했다. 너는 성적이 중간 정도여서 좀 애매했고 고민을 많이 했지만 아쉽게도 탈락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결정이 났을 테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가 쓸모 없는 사람인 것만 같고 세상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 능력없음이 부끄러웠고 누굴 탓할 수도 없지만 창피한 마음에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라 따끔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또 취업 준비를 해야 할지 아득하고 걱정스러웠다.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지? 엄마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 동안 못 들어갔던 수업부터 들어가야겠네. 하지만 이미 12월 초라서 지나간 수업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고, 학점이 떨어지는 것은 기정사실화였다.
동기들과 약속했던 카페로 향했다. 써늘하고 건조한 겨울 바람이 상기된 볼을 식혀주는 것이 못내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카페에서 다른 동기들과 이야기를 해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알고 보니 회사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전부 정규직에서 탈락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한참 후 남겨진 이들에게 소식을 들었다. 인사팀에서 "남은 사람들은 합격이니 전부 위로 올라가서 다시 일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카페에 갈 수가 없다고.
합격 통보를 받은 사람들까지 불안에 떨도록 만들다가 다시 올라가서 일하라니? 심지어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일을 해야 했다. 그날따라 유독 노골적으로 야근을 강요했던 건, 혹여나 인턴들끼리 모이면 회사에 관한 불만이 나오거나 합격자들이 동요할까봐 가로막은 것일지도 모른다. 감히 어떤 인턴이 정규직 전환에 합격한 당일에 퇴근 시간이 지났으니 그만 가보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차마 못할 것을 잘 알았을 테니 마음껏 엄포를 놓았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 카페에 모인 동기들은 전부 탈락자였다. 내가 속해 있던 신사업 부문의 인턴은 11명이었는데, 그 중 6명이 채용됐고 5명이 탈락했다. 채용된 이들 중에 남자는 4명, 여자는 2명이었다. 탈락자 5명은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였다. 여자가 많은 회사라서 성비를 맞추려고 했다는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여자들 중에 붙은 사람도 있긴 있으니, 이 문제를 걸고 넘어지면 내 무능을 입증하는 것만 같아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동기들은 정규직 전환 비율이 50%인 만큼 탈락자가 나오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사람을 내치는 방식이 가혹했다고 입을 모았다. 같이 지냈던 선배나 팀장들에게 그 동안 감사했다는 인사조차 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잔인하다고. 꼭 그런 방식으로 쫓아냈어야만 했는지, 그런 방식만이 최선이었는지 의문이라고. 실제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동기 중 한 사람은 다음 날부터 피켓을 들고 회사 건물 앞에 섰다고 한다. 우리는 낡아빠진 주전자처럼 파르르 분개했다가 식은 커피처럼 조용히 울었다가 이내 할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 기운을 잃은 모임은 일찌감치 끝이 났다. 우리는 서로 보란듯이 더 좋은 곳에 취업하자며 격려하고는 각자 흩어졌다.
이후 두 달이 지났다. 새해가 된 만큼 마음을 다잡고 취업 준비를 하겠다고 이를 갈던 시점이었다. 갑작스레 그 회사 총무팀에서 전화가 왔다. 인턴 월급을 잘못 정산했으니 일부 금액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멋쩍어하면서도 뻔뻔한 말투였다. 문자로 계좌번호를 보내줄 테니 입금해 달라며, 만약 돌려주지 않으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라는 부연 설명도 구태여 힘주어 말했다. 꼭 그런 식으로 협박하지 않아도 알아서 돌려줄 텐데, 왜 말을 저렇게밖에 못 하는 걸까. 애써 잊으려 했던 상처를 들쑤시는 것만 같았다. 다른 동기에게 연락을 해 보니 나와 똑같은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기가 막힌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고작 두 달 동안 쥐꼬리만한 월급을 주면서 뭐가 그리 헷갈린다고 이런 문제를 벌이는 것인지 실소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당시 인턴 월급은 정확히 100만 원이었다. 서울 중심가의 물가는 너무나도 비싼 바람에 점심 식사도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선하다. 가끔 선배들도, 팀장들도 없이 동기끼리 밥을 먹을 기회가 났던 날에는 늘 맥도날드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그 곳이 가장 자유롭고 저렴했기 때문이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서 '이래서 빅맥 지수라는 게 있는 건가?' 하고 혼잣말하기도 했다.
이제는 달라졌길 간절히 바라며
어느덧 그 일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났다.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니 이제는 그 회사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0년 전이었으니 별탈 없이 넘어갔겠지만 요즘에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차마 이런 방식으로는 못 하겠거니 짐작한다. 반드시 달라졌길 바란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 순간까지도 마음 한 구석이 욱신거릴 만큼 당시 나는 분명히 상처를 받았다. 첫 직장이 아니었다면 똥 밟았다는 심정으로 욕을 하고 넘겼겠지만, 하필이면 그 회사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던 곳이었다. 평소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데도 당시 겪었던 일들은 유독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물론 언제까지 상처만 부여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워낙 엄격한 집이라 내심 부모님이 화를 낼까 봐 걱정했지만 부모님은 조용히 지켜봐 주셨다. 당시 엄마는 네가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아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냐고 말씀하셨다. 그 때 그렇게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보란듯이 취업에 성공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고, 결국 졸업을 한 차례 미뤘다. 평일 오전에는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고,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는 취업스터디에 참여해 집단토론과 모의면접을 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틈틈이 채용 공고를 확인하고 자기소개서를 쓰며 보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희망 연봉을 한참 낮춰서 겨우 취업이 됐다.
악마의 자리 배치도를 아시나요
어렵사리 취업한 첫 직장은 4년을 넘게 다녔지만,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게 되면서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멍하니 지냈다. 당시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병원비는 줄줄 나가고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은 길어지자 모아놓은 돈이 바닥났다. 결국 생활비가 모자라는 바람에 소액의 빚을 지고 신용카드 리볼빙까지 하게 되었다.
빚을 갚고 리볼빙의 악순환을 끊고 월세를 내려면 다시 취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첫 직장과 같은 업계에서는 다시 일할 의향이 없었고, 이직을 시도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타 분야에서 그것도 별볼일 없는 회사에서 애매한 경력을 쌓고 나이까지 제법 먹은' 중고 신입을 받아줄 만한 회사는 많지 않았고, 그 중에 괜찮은 여건을 가진 회사는 더욱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회사를 전전하게 되었는데, 어떤 회사에서 두 달 만에 해고를 당했다.
그 회사에서는 부장과 1:1 면접을 보았다. 초면부터 반말을 찍찍 하는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나에게 "합격"을 외쳤다. 그러고는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취업이 급한 입장에서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는 좀 그렇고, 이틀 정도만 말미를 달라고 한 뒤에 출근을 했다.
그런데 출근하자마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악마의 자리 배치도'가 있다. 이는 모니터 방향이 모두 일렬로 배치된 회사로, 팀원들은 앞자리에서 일을 하고 팀장과 임원들은 뒷자리에 앉아 모든 모니터를 감시할 수 있도록 배치된 자리를 뜻한다. 그 회사가 바로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내 자리는 부장 바로 앞이었다. 핑계 같지만 나는 누가 쳐다보는 것이 느껴지면 일을 더 못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는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또 이상한 점을 알게 됐다. 회사에 있는 직원들이 대부분 입사한지 6개월 미만이었던 것이다. 왜 오래 다닌 직원이 부장 말고는 아무도 없는 거지?
회사의 퇴근 시간은 6시였지만 그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장은 6시가 되면 "저녁 먹을 사람?"하고 물었다. 저녁을 안 먹는다고 하면 왜 안 먹느냐고 물었다. 끼니를 거를까봐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왜 야근을 안 하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물론 야근을 하더라도 그 사람과 굳이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할 일이 끝났는데 왜 야근을 해야 하는지 의아했다. 주춤주춤 눈치는 보았지만 나는 6시 반, 늦어도 7시 반에는 늘 자리를 떴다.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퇴근했더니 어느 날 부장이 나를 불러 면담을 했다. 그는 나더러 "근태가 안 좋다"고 지적했다. 왜 늦게까지 야근을 안 하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야근을 하기로 작정하고 자리에 눌러앉아 있으면 회식을 하자며 밖으로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회식을 하면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노래방을 갔다. 노래방을 가면 억지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심지어 내 아버지뻘 되는 사장이 이모뻘 되는 노래방 여사장님을 끌어안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모습을 봐야 해서 괴로웠다. 회식을 하지 않고 야근할 때 부장이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면, 그는 늘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래서 부장이 잠들기를 기다리다가 몰래 퇴근하기도 했다.
부장의 업무 지시는 뒤죽박죽이었다. A라고 지시해서 A를 만들어 오면 B를 해오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들었냐며 억지를 썼고, 새롭게 C를 요구하다가 그 다음에는 왜 D로 하지 않았냐며 이것은 E로 해야 한다고 벅벅 우겼다. 그래도 부장은 언성을 높이진 않았는데 사장은 호탕하게 웃고 칭찬을 하다가도 별안간 눈을 뒤집으며 벌컥 화를 내고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사람이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사장은 제정신이기보다는 얼큰하게 술에 취한 채로 사무실에 들어올 때가 더 많았다. 업무를 보고할 때가 오면 부장과 사장의 기분이 좋기를 간절히 바라야 했다. 나중에는 요령을 하나 알았는데, 같은 결과물이어도 오후 5시에 제출하면 퇴짜를 놓았고 오후 9시에 제출하면 통과됐다.
기본적인 업무 체계나 프로세스도 제대로 갖춘 것이 전혀 없었다. 팀원끼리 협업해야 할 일이 잦아서 공유 폴더를 만들면 좋겠다고 제안했지만, 부장은 시키는 일이나 잘 하라며 묵살했다. 심지어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계약서를 언제 쓰는지 물었지만 부장은 그런 건 왜 묻냐고, 계약서 쓰면 마음대로 못 자른다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비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직원이 요로결석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직원은 응급실에 실려갔다. 부장은 직원과 함께 병원에 갔다가 홀로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자기관리 하나 제대로 못해서 이런 사달을 만든다"며 아픈 사람을 탓했다. 그 직원이 병원에 입원해서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이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정작 쓰러진 직원은 사내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물 마시러 갈 시간도 없을 만큼 자리에 눌러앉아 밤새도록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파도 쉴 수가 없는 것이, 5인 이상 기업이었지만 연월차가 아예 없었다. 어떤 직원이 연차 제도에 관해 묻자, 부장은 일하는 사람이 쉴 궁리는 왜 하는 거냐며 연차 같은 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자 출근길 버스에 오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그럼 출근을 안 해도 될 텐데. 이 버스는 왜 멀쩡히 가는 걸까. 지금 버스에서 내려서 뛰어들어 버릴까?'
우울하고 힘들어했던 건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친한 직원들끼리 몰래 저녁에 카페에서 모이기로 했다. 역시나 야근을 강요하는 바람에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한꺼번에 퇴근하면 의심을 받을 것만 같아서 차례차례 모였다. 직원들은 이 회사를 다니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며, 너무나도 힘들다며 밤늦도록 하소연을 했다. 함께 고충을 나누고 나니 조금은 속이 시원해졌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 정도로 문제 있는 회사라면 하루빨리 그만두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도 최소한의 여유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법이다.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고 우울증도 심한 상황에서는 일단 참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당장 나오지 말라고 통보하면, 제 생활비는요?
입사하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어느 금요일 저녁, 부장이 나를 불렀다. 그는 다짜고짜 월요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해고 통보를 한 것이 금요일 저녁이었으니, 월요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건 당장 짐을 싸서 나가라는 뜻 아닌가. 부장이 날 눈엣가시처럼 여긴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이렇게 사람을 바로 자른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회사에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어쩔 도리가 없으니 조용히 가방을 쌌다. 첫 직장을 퇴사한 이후부터는 회사에 두는 개인 짐을 최소화하는 버릇을 들였기에 짐은 가뿐했다.
이후 회사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동생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부장이 월요일에 회의하면서 "수습 기간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은 알아서 똑바로 하라"며 직원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내 목을 자른 것을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대학생 때 인턴을 하다가 잘렸던 것보다는 충격이 덜했다. 이것도 경험의 힘인가! 물론 부장이 눈 앞에 있었을 때는 가슴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가 났지만, 회사를 나오자 금세 머리가 차가워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할지 온갖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근로계약서 미작성 신고 및 해고예고수당 청구'를 명목으로 노동청에 신고를 접수했다.
노동청에 신고를 하면 대질조사를 위해 회사 관계자와 노동자, 근로감독관 간 삼자대면을 하게 된다. 삼자대면 자리에 출석한 부장은 회사에서 의기양양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된서리 맞은 늙은 배추처럼 뻣뻣하면서도 기세가 푹 수그러들어 있었다. 강약약강이 이런 것이로구나! 사람 태도가 180도 싹 바뀐 것이 신기했는데, 알고보니 이제까지 아무도 신고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당황한 것이었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회사인데 아무도 신고를 안 했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것이, 워낙 퇴사가 빈번한 곳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나 말고도 직원들을 마음대로 해고한 전적이 많았다는데, 이 경우에도 동종업계의 다른 회사에 입사할 것을 염두한 직원들이 혹시 모를 불이익을 겪을까봐 움츠렸던 것이다. 실제로 회사 건물 다른 층에서 사장의 형이 동종업계 사업을 했고, 업계가 좁았으니 그런 걱정을 할 만했다. 반면 나는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정말로 생활비가 없었다.
2017년 당시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수습 사용중인 근로자는 해고예고수당을 청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회사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으므로 수습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점을 맹점으로 삼아 해고예고수당을 청구했고 요건이 성립되었다.
*기존의 근로기준법에서는 근로 형태에 따라 해고 예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근로자들이 세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5년 12월 23일 헌법재판소는 '월급근로자로서 6월이 되지 못한 자'를 해고 예고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며 위헌으로 판결했다. 이후 2019년 1월 15일부터는 예고 없이 해고할 수 있는 사유가 '근로자가 계속 근로한 기간이 3개월 미만인 경우'로 일원화됐다. 내가 해고를 당했던 시기는 2017년이었다. 당시 2개월 이하로 근무했지만 계약서를 쓰지 않아 수습임을 증명할 수 없었기에 해고예고수당 청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근로감독관은 부장에게 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부장은 퇴사하는 직원들이 워낙 많아 수습일 때 계약서를 쓰는 것이 애매하고 번거롭다고 변명했다. (글쎄요. 왜들 그렇게 퇴사를 하겠습니까?) 근로감독관은 수습 직원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수습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또한 사용자는 근로자를 해고할 때 적어도 30일 전에 예고를 해야 하며, 그렇지 않았을 경우 30일분의 통상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만약 해고예고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면 이 사건은 검찰로 송치된다고 했다. (이때 부장의 얼굴이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에 내다버린 배추처럼 굳었다) 다만, 해고예고수당 청구와 사업주 처벌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근로감독관은 원만한 합의를 권유했고, 나 역시 돈이 필요했던 만큼 해고예고수당을 택했다. 부장은 회사로 돌아가서 어떻게 할지 사장과 논의하기로 했다.
근로감독관은 마지막으로 각자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부장에게 "앞으로 법을 잘 지키시라. 저한테 '계약서 쓰면 마음대로 못 잘라'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연월차도 없고 야근수당도 안 주는 회사가 정상이냐?"라고 쏘아붙였다. 부장은 당황하며 "그건 좀..."이라고 말을 흐렸다. 근로감독관은 "상대방의 진술에 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부장은 근로감독관에게 질문이 있다고 했는데, 내용이 가관이었다. 그는 "만약 수습 직원의 계약서를 썼는데 그 직원이 금방 퇴사할 경우 신고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벌써부터 남은 직원들을 어떻게 괴롭힐지 궁리하는 건가? 물론 근로감독관은 "여기는 근로자가 사업주에게 진정을 넣어서 오는 곳이다. 만약 직원이 횡령을 하는 등 큰 잘못을 했을 경우에 한해서 민사로 처리하시면 될 것 같다"라고 답했다.
정규직이 되지 못했더라도 자신을 탓하지 말아요
내가 해고를 당하고 노동청에서 부장과 삼자대면을 하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회사에서 가까이 지냈던 동생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요로결석으로 쓰러졌던 직원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짐을 싸서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나와 친했던 동생은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드디어) 계약서를 쓰기로 했지만, 동생은 그 자리에서 그만두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다른 언니도 퇴사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장은 다시 생각해 보라며 두 사람을 붙잡았지만 그들은 끝내 퇴사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퇴사한 자리에는 새로운 남직원이 왔는데, 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분은 가방끈이 길고 패기가 넘쳤다고 했다. 부장이 업무일지를 쓰라고 지시하자 새로운 남직원은 "계약서도 안 썼는데 왜 업무일지를 쓰라고 하지?"라며 작성하지 않았고, 부장이 "저녁에 다들 남아라"고 시키자 "퇴근 시간 지났는데 왜 저래?" 하고는 바로 집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며칠 후 "이 회사는 너무 문제가 많아 보인다. 이번주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겠다"라고 밝혔단다. 비록 그 분을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상황 판단이 너무나도 빠르고 정확해 감탄했다. 나도 저랬어야 했는데.
삼자대면 자리에서 부장은 해고예고수당을 순순히 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입금이 되었다. 그 사이 나도 부지런히 재취업을 준비한 결과, 예상보다 빨리 이직에 성공했다. 새로 입사한 회사는 3년을 넘게 다녔고 능력도 인정받았다.
더 이상 내 꿈은 정규직이 아니다. (실제로 지금은 프리랜서다) 내가 직종을 바꿨으니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다. 담당하는 업무가 동일하다면, 채용 경로가 다르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다만 비정규직을 전부 다 정규직으로 바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느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더라도 정당한 보수와 대우를 받고 법적인 보호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만큼,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안전하고 차별받지 않도록 울타리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나니,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규직 전환 여부로 갑질을 당하는 청춘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겪는 이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혹시라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했거나 직장에서 잘렸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저 당신이 그 회사랑 잘 맞지 않았을 뿐이다. 이는 위로가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 사실이다. 직장을 여러 차례 옮겨 보니 나는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어떤 곳에서는 내 능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흥미로웠다.
업무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와 못지않게 자신과 잘 맞는 회사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고작 몇 군데에서 외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평가 절하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어차피 이 세상에 회사는 많고, 나와 맞는 곳은 찾기 어려울지언정 분명 존재한다. 물론 회사를 다니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