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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안 Mar 11. 2022

어차피 이럴거면 꿈은 왜 물어본 거죠?

꿈이 직업인 게 당연하고 직업을 갖는 것이 꿈만 같은 사회


"여러분은 꿈이 뭐예요?"


"선생님이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언이요"


우리는 꿈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특정 직업을 답하며 자랐다. 요즘에는 "꿈을 명사로 꾸지 말고 동사로 꾸세요!"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시대가 흘렀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꿈을 묻고 직업을 답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어차피 성인이 되면 어린 시절 바랐던 직업을 갖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달을 텐데. 직업인이 되어 일하는 것 또한 결코 꿈만 같은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알 텐데. 어른들은 이런 현실을 빤히 알면서 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구태여 묻곤 한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돌이켜보면 헛웃음만 나올 텐데.



왜 미스코리아가 꿈이라고 하면 다들 웃어?


나도 어릴 적 원했던 직업을 갖지 못했다. 무척이나 이루어지기 힘든 희망사항이긴 했다. 내 최초의 꿈은 미스코리아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TV에서 어여쁜 사람들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와서는 수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는 것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아름답고 반짝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니, 그런데 이 꿈을 말하는 족족 어른들은 꺄르르 웃어댔다. 같은 유치원, 초등학교를 다녔던 또래 아이들도 전부 날 놀려댔다. 제대로 항변은 못 했지만 볼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따끔따끔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속으로 비죽거렸다. '다른 애들이 꿈 얘기할 때는 안 그러면서 왜 내가 내 꿈 얘기하면 다들 웃는 거야? 기분 나빠.'


어디 가서 꿈만 얘기했다 하면 주변 반응이 왁자지껄하다 보니, 솔직하게 이야기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난 정말 진지했는데... 미스코리아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꽤나 오래 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속마음을 꽁꽁 숨기고 상대적으로 무난한(?) 직업을 꿈이라고 이야기하게 됐다. 좀더 커서는 아예 꿈을 바꾸게 됐는데 놀림받기 싫었던 마음도 한몫 했다. 꿈을 갖는 건 자유인데 왜 특정한 꿈은 웃음거리가 되는 거지?


다행히도 이 세상에는 미스코리아 외에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직업이 많았다. 장래희망은 순식간에 휙휙 바뀌었다. 학교 선생님, 소설가, 화가, 도서관 사서, 플로리스트, 천문학자, 역사학자, 방송국 PD 등이 끌렸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진로와 직업'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직업이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가르쳤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네! 어른들이 부럽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들은 딱 잘라 말했다. "어떤 직업이든지 원하는 일을 하려면 성적이 중요하다"라고.



대학만 가면 뭐든 할 수 있다더니, 막상 취업난이래


어떤 직업을 갖든 공부는 필수였다. 그 공부라는 것은 관심 있는 직업의 현장을 방문하거나 노동법과 권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입시 준비를 뜻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이런 위로를 자주 건넸다. "얘들아, 대학 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참아"라고.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나이를 먹고 돌이켜보니 의문이 든다. 왜 10대 시절은 20대 이후 특정 직업인이 되기 위해 참고 견뎌내야만 하는 시기로 간주되고, 10대 그 자체로는 오롯이 존중받지 못하는 걸까. 좋은 직업을 가지려면 대학에 가야 하고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10대 시기에 자유를 결박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대학은 학문의 전당인데 정작 학문에 대한 뜻도 없이 취업을 위해 진학하라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러한 통념에 불만을 갖는 청소년들이 철딱서니 없다는 취급을 받는 현실은 과연 옳을까?


정작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마음껏 놀 수 있다는 건 순 거짓말이었다. 뉴스에는 청년실업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오르내렸다. 10대 때 드라마 <논스톱>을 즐겨보았는데 막상 대학에 와 보니 그건 정말 드라마일 뿐이었다. (하긴, <논스톱>도 시즌 후반에는 청년실업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속은 기분이었다. 취업을 하려면 또 스펙을 쌓아야 했다. 실제로 취업에 난항을 겪은 선배들이 졸업을 여러 차례 미루거나 서서히 연락이 뜸한 것을 보니 점점 불안해졌다. 후배들은 동아리 가입하기 전에 "동아리 활동이 취업에 도움이 되나요?"라고 물었고, 가입을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펙 쌓기에 집중하겠다며 줄줄이 그만뒀다. 나처럼 순수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은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취업문을 두드려야 했다.


학점, 토익, 토익스피킹 또는 오픽, 인적성, 자격증, 공모전, 인턴십, 대외활동, 봉사활동  각종 스펙을 쌓고 수많은 자소서 광탈(빛처럼 빠른 속도로 탈락) 압박 면접으로 멘탈을 단련하다 보니, 어찌어찌 좁디좁은 취업문을 뚫고 나올 수는 있었다. 드디어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 커서 뭐가  거니?"라는 물음에 답할  있게  걸까. 참으로 길고  시간이었다. 사회에  발을 내딛는 시기가 빨라도 20 초중반이고 요즘에는 취업이 워낙 어렵다보니 30대도 많으니까. 하지만 밥벌이 하면서 경력도 쌓고 자아실현도 이루겠다는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 '현타' 느끼게 됐다. 현타의 3요소는 다름아닌 , , 사람이었다.


직장에서 만난 어른들은 사회초년생이 기대했던 것처럼 번듯하고 점잖지 않았다. 꼰대, 이간질, 편가르기, 사내 불륜, 말바꾸기, 떠넘기기, 감정 싸움, 눈치 싸움, 뒷담화 등을 수없이 목격하며 '사회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몰상식하다고?'라며 놀랄 때도 많았다. 물론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통 마음이 맞는 사람들은 나와 처지가 비슷했던 만큼 회사를 바꿀 힘이 없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말고 일만 하자고 다짐했지만, 직무와 상관없는 엉뚱한 일들을 떠맡거나 비효율적인 시스템에 지칠 때가 많았다. 작은 회사를 다녔을 때는 아예 사수가 없었고 팀에는 나 혼자였다. 맨바닥에서 처음 하는 일들을 혼자서 해내야만 했다.


도대체 왜 이런 게 자아실현이라는 거지? 그냥 먹고사니즘으로 생각해야 할까? 문제는 월급이 너무 작고 귀여워서 의미 있는 밥벌이도 아니었다. 업무량에 쫓겨 밥 먹듯이 야근을 했지만 야근수당은 단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포괄임금제니까 티가 안 났을 뿐, 야근했던 시간까지 계산해보면 최저시급이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회사를 들어간 게 잘못인 걸까. 내 노오력이 부족했나?



처음부터 현실이라고 알려주지, 왜 꿈이라고 했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초년생들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요"라며 사직서를 내는 데에는 이처럼 수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일부 어른들은 왜 제대로 겪어보지도 않고 그만두려 하냐며 좀 더 버텨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뎌왔다. 직업 하나 갖자고 평균 수명의 약 1/3을 쏟아부으며 경쟁해 왔다. 살면서 그 정도 투자는 기본이라고 말하기엔, 당사자 입장에서는 1/3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사회초년생은 지금껏 살아온 일생 전부를 직업을 갖는 데 투자해 왔다. 용돈으로 투자한 주식이 잠깐 내려가는 것도 똥줄타는 마당에, 평생을 투자한 결과가 무너질 때 느끼는 중압감과 허탈감이 얼마나 어마어마할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결국 퇴사 열풍이 불었고 요즘에는 파이어족이 이슈가 됐다. 원래 현실이 다 그런거고, 다들 힘들어도 참고 사는 거라고요? 아니, 이제까지 우리한테 직업을 '꿈'이라고 말했잖아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럴거면 왜 꿈을 묻고 직업을 답하게 만든 걸까. 애초에 일과 직업이 지극히 현실적인 영역이라면 그걸 왜 꿈이라고 포장한 걸까. 어차피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커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뭣하러 질문하는 걸까.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뭘 좀 잘못하면 으레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라고 야단칠 만큼, '아이가 뭐가 되는 것'에 참으로 관심이 많다.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나라니까, 쓸모 있는 산업 역군이 되는 것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서 그런 걸까. 좀 삐딱하게 바라본다면, 원하는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것이 '진짜 꿈'으로 간주될 만큼 각박한 청년실업 시대라서 자꾸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것 말고는 다른 미래를 자유롭게 상상하고 꿈꾸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사회라서, 꿈이 직업으로 귀결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노동 시간이 세 번째로 길고, OECD 회원국 중 출퇴근에 소요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 만큼 일에 중독된 나라니까 말이다.



더 이상 꿈은 없지만 노는 건 사치다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남긴 유명한 대사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 없기 때문에 놀 수 없다. 평생 숨만 쉬고 일해도 내 집 마련이 힘든 시대가 되었지만, 일하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어쨌든 먹고 살아야 하니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과연 우리는 일과 직업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앞으로 일의 의미, 일을 하며 느끼는 희노애락, 일의 현실과 미래 등 수없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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