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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Feb 07. 2018

하노이: 이 곳에는

그 무엇도 죽어 있지 않다


하노이에서의 닷새 동안 나는 간절하게 분리를 원했다. 아니 여행이랍시고 가서 웬 분리냐 물으신다면 '선'이라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저돌적인 오토바이 떼로부터, 취미처럼 울려대며 귀를 파고드는 경적 소리로부터, 차와 오토바이와 사람이 (혹은 그에 더불어 개와 닭이) 한데 어울려서 내는 어마 어마한 시끌벅적함으로부터 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음과 왁자지껄함은 언젠가 내가 적막과 고요와 맞닥뜨렸을 때,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그럴싸한 감동을 선사했으며 '아니 이것이 어쩌면 내가 이 곳에 온 이유?'와 같은 우스운 상념에 잠기게 하는 것이었다.


흔한 하노이의 퇴근 시간.jpg


그렇게 홀로 골목골목을 뚜벅이며 나는 어떤 소리를 들은 듯했다. 이 습하고도 뜨거운 도시의 무질서함이 내 목덜미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 '얘, 여긴 죽은 것이 하나도 없단다.'


'모든 것이 살아있는 곳'과 '아무것도 죽어 있지 않은 곳'의 두 구절은 비슷한 듯 하나, 내가 받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첫 번째의 문장이 신선하고, 생명이 넘치는 초록과 노랑의 순수한 환희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이후의 문장은 분출과 뒤엉킴이 한 데 일어나는, 수만 가지 색이 흩뿌려져 만들어내는 검정의 위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내게 하노이는 그런 곳이었다. 새까맣게 매연을 뿜으며 내달리는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앉아서 푸르고 잔잔한 서호(西湖)를 바라보며, 정체불명의 물기로 가득한 음침한 골목을 뒤로하고 펼쳐지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더럽고 시끄러운 거리에서 자신의 몸집만 한 바구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걸음을 옮기는 그네들의 강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다양한 색을 보았고, 그들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매력에 이끌렸다. 그 무엇도 죽어 있지 않은 도시에서 나는 분리를 원하는 동시에, 어쩌면 차츰 함께 녹아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원을 향해서 걸어가는 길에, 서호
내밀하게 숨겨진 파릇한 골목. 여기에 Hanoi Social Club이 있다.
Hanoi Social Club에서 먹은 햄버거. 젊은 예술가들로 가득할 것 같은 이 공간에서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가 찾은 곳은 주로 카페였다. 호스텔 직원이나, 투어 사무소 직원들에게 주로 정보를 구했다. 괜스레 'local'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며, 이방인이 감히 침범하기 힘든 그들만의 공간에 자리하고 싶다는 은근한 욕망을 내비쳤다. 글쎄, 내 뜻이 제대로 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게 알음알음 찾아 간 공간들에서 '행복한 분리'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달까.


그렇게 찾아간 곳은 Giảng Cafe

39 Nguyễn Hữu Huân, Lý Thái Tổ, Hà Nội, 베트남

호안끼엠 호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따뜻한 에그커피. 비가 추적 추적 오는 노곤한 날씨에 참 잘 어울렸다.

호안끼엠 호수 주변의 건물에 자리한 루프탑 카페. 입구를 찾는 데 정말 애를 먹었다. 당시에 비가 조금씩 오고 있었는데 금세 그칠 거라 생각해서 우비니 우산이니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그런데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구글 지도에 나오는 위치는 분명 여기가 맞는데 입구는 안 보이고, 마음이 조급했다. 결국 입구를 찾게 된 것은 바로 옆 상점 앞에 앉아 있는 경비 아저씨에게 약도와 이름을 보여주면서였다. 어라 바로 옆 통로였네. 어리숙한 발음으로 '깜먼(감사합니다)'을 겸연쩍게 내밀고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로 향하는 통로는 이 끝에 정말 카페가 있는 거야, 하는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사진으로 옮기면 좋으련만 마음이 급했다. 통로 양 옆으로는 옷이니 액세서리를 파는 상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좁은 통로로 오토바이까지 다니더라. 비도 오니 발걸음을 옮기는 데 물웅덩이가 있나 없나 하며 살피고 걸어야 할 정도였다. 근데 조그만 표지판이 보인다.  Giảng Cafe 하고 왼쪽을 가리키는 작은 화살표. 반가운 마음으로 몇 걸음 더 옮기니 아래의 공간이 나타났다.

고혹적인, 그런 분위기.

마법같이 다른 세상으로 온 기분이었다. 짹짹이는 새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드니 새장 속에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우중충한 바깥과 달리, 그냥 그곳은 참 맑았다.

짹!짹!
피난처

멍하니 새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 새 점원이 나를 맞아준다. 따뜻한 에그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랐다.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없어 내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멈춰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좁았다. 그렇게 한 층, 두 층, 세 층 정도 되니 탁 트인 루프탑이 나온다.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드문 드문 천장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글을 썼다. 그 공간에선 둘 씩, 셋 씩 앉아있는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마치 모래 폭풍이 불어오는 성난 사막을 견딘 후, 마침내 고요한 오아시스에 도달하여 목을 축이는 나그네들처럼. 어딘지 한 구석씩은 지쳐 보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찌할 수 없는 실낱같은 동지애를 느꼈다. 곧 점원이 건조하게 에그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 한 잔에 담긴 적막의 환상을 음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오래,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피난처에서, 비 오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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