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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Mar 24. 2018

리스본: 그렇게 그렇게 마주친

광장의 삶, 골목의 삶

7개의 언덕이 있는 도시 리스본. '코임브라'에서 버스로 3시간 정도를 달려왔을까.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대저택 같았던 코임브라에서의 숙소는 추억으로 남겨두고, 허름한 아파트를 개조한 것 같은 리스본의 숙소로 들어섰다. 구불거리는 파마머리를 한 리셉션이 가방을 받아주곤 간단한 도시 설명 후 방으로 안내해준다. 싱글싱글 웃는 낯이지만 묘하게 수줍음을 타는 친구구나 생각했다. 내 자리는 창가 쪽 벙커 베드 1층. 제발 밤에 조용했으면 하고 속으로 기도했다. 


침대에 누워서 방금 사 온 체리를 먹고 있는데 방을 공유할 사람들이 속속 들어온다. 간단한 인사 후, 옆 침대 폴란드 아저씨의 '행복이란 뭘까'라는 질문에 깔깔대며 좋은 맥주와 좋은 친구죠 하던가, 또 옆 침대의 브라질 사람으로부터 바로 여기 리스본에서 축제가 열렸는데, 거기에 마룬파이브와 아리아나 그란데가 왔고, 그게 육십 유로도 안 했고, 그게 바로 어제였고, 왜 너는 몰랐냐고 하는 말에 머리를 쥐어 뜯기도 했다. 누워 있다 보니 몸이 나른해졌다. 피곤한데 좀 쉴까 했다가 괜히 아쉬운 마음에 문을 나섰다.

낡디 낡았지만 문짝과 창살은 여전히 낭만적이다

트램을 타려 정류장을 찾았다. 7개의 언덕을 누비는 트램은 리스본의 명물이다. 그중 관광객들을 위해 주요 스폿을 순환하는 노란색 트램은 리스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트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주 운이 좋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리스본에 머무는 중 행운이 따르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칠이 다 벗겨져 가는 벽을 눈으로 좇았다. 


그냥 걸어볼까 싶다. 길을 좀 익혀놓아야 나중에 편할 테니. 다시 지도에 고개를 박는다.

  

숙소에서 15분, 20분 정도를 걸으면 광장으로 가는 대로가 나온다. 메뉴판을 내밀며 앞을 막아서는 호객꾼들을 뒤로 하면 물 냄새가 멀리서부터 바람에 실려 왔다. 곧 걸어온 거리가 어색할 만큼 웅장한 광장이 드러난다. 코메르시우 광장에 발을 딛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대항해시대를 지배했던 몇 세기 전의 도시에 나 혼자 뚝 떨어져 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눈을 감으면 '왕좌의 게임'에서나 볼 법한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날까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착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새 곁에 다가와 코카인? 마리화나? 하고 약봉지를 흔드는 그네들 덕분에.

노 땡큐.

주제1세의 기마상, 그리고 아우구스타 아치 
어쩐지 아치보다 하늘이 더 눈에 띈다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은 느낌...
몸을 낮추지 않으면 카메라 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아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섬세하게 조각된 저 돌덩이들이 쏟아질 것 같다는 우스운 불안을 느낀다. 곧 이런 건축물은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이 만들었을 거라니, 몇 대 불가사의에 들어가야 한다느니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여행지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포르투갈을 간다고 하면 리스본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포르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사람들이 한 트럭이었지만 '리스본'에 대해서는 (포르토보다 더)지저분하다, 약쟁이들이 많다(진짜였다...), 어찌 되었든 포르토보다는 별로다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파란 시간의 코메르시우 광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패스트리는 얼마나 맛있는지, 노란색 트램이 얼마나 낭만적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속에 생략된 리스본의 얼굴을 직접 느끼며,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아낸 마냥 얼마나 즐거워했던지.

저걸 어떻게 만들었냐고 진짜

저녁 즈음의 거리는 반짝이기 시작한다. 가게는 불을 밝히고 둘 씩, 셋 씩 짝을 지은 사람들은 다정한 목소리들을 내며 곁을 지난다. 외로움을 잘 타지도, 여행만큼은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이지만 들뜬 저녁의 거리는 나에게 너무 가혹하다. 그러다가 한국인 P를 만났다. 처음에 어떻게 말을 트게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들고 있는 카메라가 반짝했다. 사진을 좋아한다고 했다. P가 어떻게 여행을 하고 있고, 어떻게 리스본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는데 그 기구함에 '와아~'한 기억이 난다.


야경을 보고 싶은 날엔 P에게 연락을 해서 언덕을 걸어 올랐다. '샹그리아 블랑코'도 한 잔 씩 마셨겠다, 오랜만에 한국말로 떠들다 보니 즐거웠다. 음식점들은 하나같이 야외 자리에 불을 켜고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노르스름한 불빛 아래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경쾌하다. 아래 위로만 왔다 갔다 하는 관광용 트램은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속은 매 번 다른 언어들로 채워진다. 광장을 등지고 골목의 삶이 펼쳐진다.

늦은 밤의 트램
'리스본'을 가장 잘 설명하는 한 장

나는 하릴없이 트램을 몇 번이고 타며 트립어드바이저에서 1등 했다는 '파스텔 데 나타'를 먹으러 갔다. 흔히 '에그 타르트'라고 알고 있는 패스트리가 바로 그것이다. 하루에 꼬박꼬박 두어 개는 챙겨 먹으니 밥때를 놓치기가 일쑤였다. 테이블도 없는 그곳의 바 한편에 서서 베어 문 패스트리는 와사삭하며 부서졌다.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다가 달콤함이 전신에 퍼지면 그를 동력으로 또다시 길을 나섰다. 5월 말의 선선한 바람은 골목을 훑으며 보란 듯이 널려 있는 빨래를 흔들었다. 빨래가 나부끼는 사진을 찍으며 이 동네 사람들은 색 조합을 고려해서 빨래를 너는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헤지고 낡은 리스본의 골목은 아름답다.

과거의 영광을 아로새긴 광장이 아름다운 것만큼, 지금을 살아내는 골목 또한 아름답다. 이제는 바위 덩이로 박제된 과거의 유명 인사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좇지만, 좁은 골목길에서 이방인에게 길을 내어주는 이름 모를 이는 눈으로 미소를 건넨다. 광장에 결코 수여받지 못하는 동상의 월계관이 있다면, 골목에는 백발이 성성한 주인장이 즐거이 따라주는 와인이 있다. 골목의 삶은 결코 낡은 타일이나, 칠이 벗겨진 페인트가 떠올리게 하는 초라함과는 거리가 멀다.

늦은 봄
높은 곳에 오르면 오렌지빛 지붕이. 

트램을 타지 않고 걸어 오르는 언덕은 가파르다. 허리를 꺾고 숨을 몰아쉬게 한다. 가까스로 몸을 펴고 눈을 돌리면 오렌지빛 바다가 펼쳐진다.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몇 있다. 지붕은 해를 받아 더욱 쨍하게 빛이 난다. 그 아래로 흘러가는 골목의 삶이 정겹다. 느리게 걷는 사람들은 광장에 새겨진 승리나 패배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는 듯하다. 그저 묵묵히 이방인에게 미소를 보내고, 길을 내어주며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나는 광장을 등지고 섰다. 깨어진 타일을 매만지며 나 또한 오늘을 살아내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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