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기억
'포르토'하고 발음을 하면 동그랗게 모아진 입 안으로 포트와인의 향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두어 병 정도 사 왔어야 했는데. 포르토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의 천국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라는 상 벤투 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렐루 서점. 거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포르토라는 곳에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포르토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으로 시작하는 곳들을 차치하고서라도 특유의 아줄레주(타일 공예) 양식과 포트와인으로도 유명하다. 타일 한 조각을 보았을 때는 상상하기 힘든 역사 속의 장면들이 수 십, 수 백 장의 푸른 타일로 만들어지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다.
포트 와인은 또 어떤가. 혀를 찌르는 달콤함에 한 잔, 두 잔 홀짝이다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포트와인은 보통의 와인과 다르게 발효 과정 중에 브랜디를 섞는데, 그러면 맛은 더욱 달콤해지고 도수는 18도 정도로 올라간다. 조그마한 잔에 담아 목으로 넘기면 목을 타고 흐르는 따뜻하고 달달한 향이 어찌나 황홀한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잔을 사이에 두고 사랑에 빠졌을까.
포르토 곳곳에 있는 와이너리에서는 저마다의 와인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프로그램을 신청한 사람들과 다 같이 양조장을 돌아보며 포트 와인의 역사부터 어떻게 만들어지고 저장되는지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고, 투어의 마지막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와인을 먹은 그 순간만 남아있다.
Ferreira
Avenida Diogo Leite 70, 4440-452 Porto, 포르투갈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반. 해가 쨍쨍했던 마드리드와는 판이하게 다른 포르토의 구슬픈 날씨는 잠깐의 비행을 실감하게 한다. 어느 도시에서나 그렇듯이, 툭 하고 짐처럼 새로운 도시에 떨어지면 얼른 구글 지도를 켠다. 미리 저장해 놓은 호스텔을 찍은 후 충실하게 지시를 따르다가 '내가 이렇게 말을 잘 들었던 적이 있나' 하는 생각에 이를 때쯤이면 거의 다 온 것이다.
Gallery Hostel Proto, 포르토 갤러리 호스텔
Rua de Miguel Bombarda 222, 4050-377 Porto, 포르투갈
벽을 타고 흐르는 타일이나, 그림이나, 자그마한 중정처럼 만들어져 있던 흡연실(?)이나, 저녁을 대접해주었던 길고 큰 테이블이 있는 다이닝룸이나. 빈티지하지만 아기자기한 그 공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아주 푹신한 침대 덕에 정오가 다 되도록 늘어지게 잠을 잤고, 같이 방을 쓰던 여행객들에게 '너 되게 잘 자는구나'하는 놀라운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차 적응 탓을 했었지. 당시에 썼던 다이어리에도 '내일 밥은 뭘 먹지... 프란세자냐! 참, 제발 아침을 먹어보고 싶다 하하!'라고 적혀있는 걸 보면, 유독 포르토에서는 늦잠을 많이 잤었던 것 같다.
프란세자냐는 빵 사이에 고기, 햄, 치즈 등을 잔뜩 넣고 특제 소스를 부어 나오는 포르투갈 샌드위치의 일종이다. 포르투갈 대표 음식이긴 하지만 기름지고 느끼하다는 평이 있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름 맛있다는 집을 찾아가서 맥주 한잔과 함께 주문해봤다.
Bufete Fase
Rua de Santa Catarina 1147, 4000-099 Porto, 포르투갈
그런데 되게 맛있다. 평소에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 먹고야 말았다! 심지어 맥주도 두 잔이나! 사실 맥주는 한 잔만 마시려고 했는데 내 빈 잔을 보더니 스텝이 한 잔 더 줄까 묻더라. 나는 더 먹지 않으려고 '암 굿. 땡스.'라고 했는데, 스텝이 굿? 굿! 하더니 한 잔을 더 가져온다. 예?
그래 이거 먹는다고 죽겠냐 싶어서 한 잔 더 비웠는데, 곧 배가 터져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프란세자냐.
갤러리 호스텔에서는 재밌는 친구들을 참 많이 만났다. 다들 여행자들이다 보니 거리낌 없이 어울리곤 했는데,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스테파니란 친구와 굉장히 친해져서 이후 그라나다에 갔을 때 다시 만나기도 했다. 친해진 계기가 좀 우스운데 첫 만남에 영어로 서로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다가 그 친구가 나보고 스페인어 모르냐고 묻더라. 그러니까 단순히 모르니? 가 아니라 왜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니? 의 뉘앙스랄까. 푸에르토리코는 스페인어를 쓰니까. 난 모른다고 하고 그럼 너는 한국어 아냐고 물어봤다.
Ah. No.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내뱉는 그 '아'가 너무 우스워서 둘이 막 웃다가 그렇게 친해졌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이렇게 싱겁게 시작되기도 한다.
호스텔을 나서서 도우로 강가로 향했다. 하늘이 우중충하더라니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스스스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빗방울이 얼른 굵어진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창문에 '초콜릿...'이라고 쓰인 카페로 들어갔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한적했을 것 같은 작은 카페는 나처럼 촉촉한 머리를 하고 들어선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문가에 자리를 잡고 핫초코와 당근 케이크를 하나 시켰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물이 고인 거리를 뛰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물방울이 튄다.
한 모금 들이킨 핫초코는 정말 초콜릿을 방금 녹여서 내온 것처럼 꾸덕하고 달콤하다. 방금 전 프란세쟈나와 맥주 두 잔을 들이켜고 온터라 케이크를 삼분의 일 정도 남겼는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인 할머니께서 묻는다. '맛이 없니?' 분명히 그렇게 묻고 계신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만 했다. 배를 두드리며 최대한 울상을 짓고. '배가 너무 불러요'
Chocolataria das Flores
Portugal, R. das Flores 121, Porto, 포르투갈
그러고 보니 포르토에 머무는 동안은 비가 몇 번 더 왔었다. 비 오는 날, 하루는 한국으로 택배를 부치려 우체국으로 향했다. 예뻐 보여서 산 포르토산 접시들과 기념품 몇 가지가 꽤 묵직한 것이, 앞으로 두 달이나 남은 여행 기간 동안 들고 다니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잔뜩 봇짐을 지고 우산까지 들어가며 힘겹게 도착한 우체국은 웃음기 없는 표정과 사무적인 손짓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다 차례가 되어 창구로 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표정이 영 좋지 않은 아주머니가 날 맞아주었는데, 내가 포르투갈어를 모르니 짧은 영어로 뭘 보낼 거냐, 어디로 보낼 거냐 등을 묻고 답했다. 무엇보다 선물을 10만 원어치 샀는데 배송료가 17만 원이라는 말에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장을 내려앉게 한 것은 짜증 섞인 아주머니의 쏘아붇힘이었다. '넌 우리로부터 환영받지 못해'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그녀 덕분에 우체국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우여곡절 끝에 17만 원이라 나온 소포를 5만 원에 부치고(포르토에서 택배는 한 번에 많이 보내지 말고, 조금씩 여러 번 보내도록 합시다!) 문을 나서는데 비는 여전히 추적이고 있었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핸드폰을 켰다가 우수수 가족의 걱정 어린 메시지들이 떠오른다.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눈물이 찔끔 나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 때문이다. 비가 그치고 다시 나선 길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과 마주쳤다. 포르투갈의 학생들은 다들 까만 교복을 입고 다니는데, 다들 마법 지팡이 하나씩은 품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K. 롤링이 그 유명하다는 포르토의 '렐루 서점'에서 해리포터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해리포터의 탄생에 여기 이 학생들도 한몫했으리라. 어떤 노랫말인지는 몰라도 쾌활한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을 덩달아 미소 짓게 만든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언제나 호의와 친절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날카로운 시선과 부딪힐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나를 지배하게 두느냐, 마느냐 결정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우체국을 다녀온 날 하루를 마무리하며 수첩에 한 마디 끄적였다.
'나의 하루 중에 그 찰나의 시간이 망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포르토에서의 여정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