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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Jan 18. 2019

세비야: 프롤로그  

리스본에서 세비야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탔다. 목베개에 안대에 덮을 옷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고 차에 올라탔는데, 아뿔싸. 귀마개를 안 챙겼다. 쩌렁쩌렁 버스를 울리는 음악 소리에 몇 번을 자다 깨다를 반복했을까. 우르르 내리는 것을 보니 도착했나 보다. 버스 트렁크에서 가방을 건네 받고 대합실로 향했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하늘이 아주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숙소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평소엔 거뜬했던 배낭도 그날따라 어찌나 무겁던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두 자리가 있는 좌석으로 가서 창가는 내가, 통로 쪽은 배낭이 차지했다.


꾸벅 고개가 떨어질 뻔하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말간 햇살이 건물에 드리우기 시작한다. 무너지는 눈꺼풀을 일으키려 작은 카페에 들렀다. 카페 콘 레체, 뽀르 빠보르. 동전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손바닥에 와르르 쏟아서 주인장에게 내미니 딱 그만큼 걷어간다. 유리잔에 담긴 따끈한 카페라테가 나왔다. 새벽에 지저귀는 새들이 머리 위를 맴돌았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짹짹! 곧 벌어질 '새'와의 악연을 암시한 것이었을까...
부지런한 아주머니들

이게 말로만 듣던 세비야 대성당이로구나, 하며 인적 드문 대로를 걸었다. 새벽에도 미사를 하나 싶어서 미사 스케줄을 보러 문 앞까지 다가섰다가 닫힌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럼, 아직 너무 이른데. 그러고 보니 숙소에 일찍 간다고 말을 하지 않은 기억이 났다. 아이고 내 정신아. 혹시 모르니, 정말 혹시 모르니 가보자.


숙소는 대로에서 골목을 몇 개는 지나야 있었다. 가지가 뻗어 나가듯이 꼬불 꼬불한 골목에서 구글맵의 새파란 점은 내가 딛고 있는 곳과는 별개로 그 나름의 세비야를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숙소 대문을 못 찾아서 문을 연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위치를 물었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하죠? 숙소의 주소를 한 번 보더니 속사포처럼 떨어지는 손짓과 하이톤의 스페니쉬는 저 멀리 혼자 반짝이는 구글맵의 파란 점만큼이나 내게 아무 정보를 주지 못한다. "하하.. 그라씨아스"하며 뒤돌던 나의 머릿속에 야심 차게 1교시 초급 스페인어 수업을 신청했다가 간신히 C 정도를 받은 대학교 1학년의 내가 떠오른다. 교수님 그때 좀 열심히 할 걸 그랬나 봐요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숙소의 문은 역시나 굳게 닫혀있다. 벨을 몇 번 눌리고, 예약을 한 앱으로 메시지도 보내 보았으나 묵묵부답이다. 그럴 만도 하지. 저 때가 아마 오전 8시도 안 됐을 것이다. 수확 없이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대로변으로 나섰다. 분수와 벤치가 있어서 가방을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아침부터 부지런한 집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게 집시들은 여행자에게 물건을 팔거나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쩐지 내가 꾀죄죄해서였을까. 그저 벤치 한편을 나누어 앉곤 햇살이 잠든 사람들의 머리맡에 닿길 기다렸다. 

새벽녘의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되었겠지 싶어서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열려있다! 들어서니 아만다 사이프리드 닮은 엄청나게 예쁜 리셉션이 날 맞이했다. 너 진짜 이뻐 이렇게 말할 뻔했다가, 이상하게 볼까 싶어 관두었다. 야간 버스를 타고 와서 죽을 것 같다고 하니 마침 내 자리 침대가 비어 있다고 좀 쉬라고 한다. 예쁜데 친절하기까지 해라. 방에 들어서니 침대들은 꽉 차 있는데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다들 푹 자고 있나 보다. 간단히 씻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줄기차게 들리던 댕 댕 하는 종소리가 어느 순간 들리지 않더니 후끈한 기운에 눈을 떴다. 정오가 지나고 있었다. 몸을 일으켰다. 이젠 내 침대 말고는 모든 침대가 비어있다. 그렇게 뜨겁다는 세비야의 낮을 만끽 하러 다시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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