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에 컵라면이 먹고 싶은 당신에게
우리 집엔 유행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1분 뒤에 어째 될지도 모르는데!'
어젯밤에도 엄마, 아빠, 동생, 나 우리 가족은 거나하게 한 상을 차렸다. 치즈에 고기에 와인까지 같이 홀짝이니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행복이 기분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다 먹고 치우려는데, 아빠가 "어우, 난 이제 컵라면 하나 입가심으로 먹어야겠다!"하고 선언을 한다. 우리 셋은 득달같이 '아빠 배가 요즘 너무 많이 나와서 안 된다, 라면 나트륨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냐, 혈관 좁아진다' 잔소리를 퍼붓는데 아빠는 씨익 웃으며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한다.
"1분 뒤에 어째 될지도 모른다! 먹고 죽는 게 낫다!"
다들 큭큭 웃으며 '아이고, 알겠네요'하며 포트에 물을 올린다. 웃고 넘겼지만 새삼스럽게 부모님의 삶, 우리의 삶, 나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 우린 다들 유한한 삶, 심지어 그 끝이 언제인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구나.
컵라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이것은 쾌락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1분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대출 땡겨서 롤스로이스 타고 루이뷔통 밥그릇에 국 끓여 먹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끝이 있는 나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는 즉, 내가 무엇에 의미를 두고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는 가를 돌려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내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전제로 두면 삶의 다양한 부분들에 우선순위를 매기기가 쉬워진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나는 일주일 뒤에 죽는다. 이 순간 내게 가장 후순위가 되는 것은 '지금 재미있는 것'이다. 가십, 말초적인 자극만을 주는 콘텐츠, 게임 등등 이런 것들을 살아있는 동안 보고 듣기 위해 아등바등하지는 않을 것 같다.
반면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고,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싶은 것은 '관계'다. 가족들에게는 지금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욱 많이 할 것이다. 연인에게는 당신 덕분에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당신을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를 전달할 것이다. 나의 오랜 친구들에게는 변함없이 내게 믿음을 주고 아껴주고 내가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줘서 고맙다고 하고 싶다.
이렇게 보면 나를 성숙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관계'이고, 이 것이 내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내가 일주일 뒤에 죽는다는 것에서 '내가 3달 뒤에 죽는다면? 내가 1년 뒤에 죽는다면? 내가 10년 뒤에 죽는다면?' 등으로 범위를 늘려가면 하나하나 내가 어디에 어떻게 시간을 써야 하는지 보다 촘촘하게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다.
그리고 우선순위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나만의 기준과 색깔을 가진 나만의 삶,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자유롭고 풍성한 삶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기 위해 나는 여전히 연습 중이다. 무뎌지는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쏟고 후회하는 날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누군가는 나를 '자유로웠으며, 작은 것에 감사했고, 곁에 있는 사람을 웃게 만들었던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