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각은 면접관이 ‘좀 더 새로운 아이디어 없을까요?’라고 심드렁하게 눈길을 거두던 때 내 머리를 강타했다.
지독히도 더운 스물 몇 살의 여름이었다. 몇 번의 고배를 마시던 중, 외국계 회사의 면접 일정이 잡혔다. 아무리 걸쳐도 적응이 되지 않는 H라인 치마 정장에 몸을 우겨넣고 새벽부터 나섰다. 열차 안을 채운 넥타이와 서류가방 부대는 ‘나도 이 면접만 잘 보면’으로 시작하는 달뜬 마음에 부채질을 했다.
으리으리한 빌딩 속, 사무적이지만 친절한 직원들의 손짓으로 면접대기실로 향했다. 먼저 와 있던 몇몇의 지원자들은 한 눈에 봐도 한국말보다 영어가 편해보인다. ‘여기가 한국이야, 미국이야.’하며 슬그머니 했던 생각은 ‘저런 애들이랑 경쟁해야 하는거야?’하는 발상에서 나온 약간의 불안과 초조함의 발현임을 인정한다.
(내 기준)말도 안 되게 어려운 시험을 본 후, 호명되어 면접장에 들어섰다. 5분만에 망쳤음을 인정했다. 회사가 원하는 고민의 깊이와 참신함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찝찝하게 면접을 마무리한 후 스스로에게 ‘그래도 괜찮다, 이것도 좋은 경험이었다’하는 등의 위로의 말을 건냈다. 가방을 둘러메고 면접장을 나서는데 누군가 ‘저기요!’하고 외친다. 날 부르는건가? 돌아보지 않으니 한 번 더 ‘저기요!’라 외치는 목소리가 탁탁 하는 발소리와 호흡을 맞추며 좀 더 가까워진다.
그제야 돌아보니 아까 면접장에서 봤던 교포 느낌의 키가 큰 여성분이다.
“면접 어땠어요?”라고 물었고
나는 “완전 망했네요.”라고 답했다.
우리 둘은 “어휴 무슨 면접이…”라며 씩 웃었다.
“괜찮으면 맥주 한 잔 할래요?”라고 하길래,
“어머 좋아요”라 답했다.
그렇게 곧장 눈에 보이는 맥주집으로 들어섰다.
한 잔, 두 잔 맥주를 들이키며 면접 이야기에서, 연애로, 인생으로 난생 처음 보는 사람과 가게가 떠나가라 떠들어댔다. 면접장에서의 무너진 기분은 어디로 쓸려나갔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름이 Carol인 이 언니는 밝고, 에너지가 넘치고,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두어시간 떠들다 “조심히 가, 정인아!” 하고 꼭 안아주던 언니를 이후에도 종종 만났다. 만날 때마다 우린 맥주를 마셨고 이 날을 추억했다. 아, 참고로 면접은 둘 다 떨어졌다.
여전히 난 맥주를 좋아한다. 거품이 바스라지는 소리는 그 날의 웃음소리를 불러온다. 목을 긁으며 넘어가는 까슬한 탄산은 목구멍에 걸려 있던 모든 착잡함과 답답함을 쓸어보낸다. 배를 통통 두드리게 하는 포만감은 바짝 날 서 있던 신경을 풀어주고 ‘더 좋은 내일이 올거야.’라며 날 격려한다. 어느덧 나도 누군가 힘이 든다 할 때 “맥주 한 잔 할래?”하는 사람이 되었다. 난 맥주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