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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Jun 06. 2024

할아버지 생각

현충일이라 할아버지를 뵈러 갈까 했다. 그러다 곧 사람이 많아 오도 가도 못하겠다 싶어 마음을 접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데 발걸음이 어렵다.


6.25 전쟁에 참전하셨던 할아버지의 등에는 큰 흉터가 있었다. 쏟아지는 총알이 이십 대의 어린 몸을 찢었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하루의 많은 시간을 누워계셨다. 수술을 해도, 약을 먹어도,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도 어떤 것은 도저히 낫지 않는다.


십여 년 전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나는 많이 울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 근 몇 년을 암과 치매로 많이 앓으셨던 터라 오히려 할아버지가 비로소 낡은 육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셨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를 붙들고 있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땅의 시간이 끝나고 하늘로 돌아가신 것은 결국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염이라고 하나. 할아버지의 몸을 닦고 있는 모습을 유리로 된 창에 손을 짚고 바라보며 양 옆에서 고모들과 아빠, 삼촌들이 아부지 아부지 하면서 소리 내어 울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그때도 울지 않았다.


다만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은 몇 년에 걸쳐 지금도 가끔 뜨악하고 쏟아진다. 양치를 한다거나, 빨래를 갠다거나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 속에서 할아버지와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이 파도같이 밀려오면 금방 목이 메고 눈이 붉어진다. 이때 흐르는 눈물은 뭐랄까, 슬퍼서 운다기보다는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그 기억과 그에 묻어있는 사랑이 묵직하게 마음을 눌러서 그게 그냥 눈물샘까지 꾸욱 눌러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흐르는 것 같다.


어릴 때 하도 덤벙거렸던 나는 아무리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거라고 해도 우산을 가져가는 걸 까먹곤 빈 손으로 털레 털레 학교로 가곤 했다. 교실에 도착해서 우산을 안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천하태평이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올 듯 날씨가 흐려지면 할아버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우산을 가지고 학교로 찾아오셨다. 교실문의 자그마한 불투명 유리에 어른어른 누군가가 비치면 그는 꼭 우리 할아버지였다. 담임 선생님이 정인아 할아버지 오셨네, 하고 우산을 받아 건네주시며 할아버지 많이 닮았구나 하는 말씀을 들으면 좋으면서도 괜히 멋쩍어서 고개를 푹 숙인 기억이 난다. 미끄러지며 닫히는 교문 사이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항상 웃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로 오는 길은 몸이 성하지 않은 그에게 그리 편안한 길이 아니었다. 학교 교문까지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은 당신에겐 아득히 힘든 여정이었으리라. 난간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며 당신은 몇 번이나 쉬셨을까. 그렇게 디딘 그 걸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다.


이후 몸이 더 편찮아지시고, 치매로 맑은 정신을 잃으셨을 때에도 내 걱정을 쉬지 않으시던 할아버지였다. 고등학생 때 야자를 한다고 늦게 들어오면, '아가는 왔나?' 하고 수십 번을 수백 번을 가족들에게 물으셨다고 한다. 언젠가는 내가 집에 있는데도 하도 날 찾으시며 소리를 치시길래 홧김에 짜증이 나서 '여기 있잖아요! 그만 좀 해요!' 하고 소리를 빽 질렀는데, 누워서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환히 웃으신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지금의 내 마음을 저민다.


나를 너무 사랑해 주셨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일 년인가 이년만에 딱 한 번 내 꿈에 나오셨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다른 할아버지들과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시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더니 '정인아 잘 지내고 있제, 내는 잘 있다.' 하셨던 따스한 음성이 생생하다. 그 꿈속에서 나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하셨던 남자친구를 소개했다. 그는 지금 내 남편이 되었다.


현충일에 현충원 생각하다가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구구절절 쓴 글인데 쓰다 보니 결국 또 눈물 콧물 범벅이다. 내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살아계실 할아버지, 우리 훗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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