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甫竪 一日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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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방금 전에 확실한 뭔가를 쥐었다고 생각했던 이보는 갑자기 울려온 전화 탓에 저녁의 약속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다시 정신을 차려 UFO의 격납고를 빠져나오자 움켜쥐었던 빈 손을 아쉬워해야만 했다. 바로 이건데 바로 좀 전에 느꼈던 그건데 하며 전화를 걸어온 B를 탓하고 기록하지 못하게 멀리 있던 수첩과 수첩과는 늘 함께하지 않는 볼펜과 아까의 그 뭔가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이보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무슨 노래 가락 같은 걸 비 맞은 중에 염불로 흥얼거리다가는 좀 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숲 사이의 벤치에 앉았다.
숲의 한편에는 ‘아름 뜰’이라는 이름의 빵집이 보이고 그 옆으로 긴 계단과 구둣방이 보였다. 아마도 이 벤치가 있는 숲이 '아름 뜰'인 모양이다. 볕에 잘 마른 낙엽이 까닥이는 이보의 발에 좋은 소리로 사각였다. ‘난 버림받았어.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보기 좋게 차인 것 같아. 빌어먹을 내 가슴속엔 아직 니가 살아있어.’ 뭐 이런 가사를 중얼거리다가 이보는 번뜩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또 이런 곡절로 갈아타기에 누구의 곡절인지 닿은 듯 바로 멀어지고 막혀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한잔해야겠어.
빵집에서 커피를 들고 나온 이보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며 계단을 올라가는 여대생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햇발이 나무들 사이사이를 통과하며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앞뒤로 늘어졌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이보는 그 풍경이 우아하다고 느껴서는 빨아들인 담배를 목 너머로 들이키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보는 서둘러 멀어졌던 수첩을 꺼내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는다.
‘여자는 햇살이 비추는 벤치에 앉아
빛을 향해 가슴을 열었다.’
마침표를 찍고 따옴표를 힘차게 긁은 이보는 기다리던 고도가 오기라도 한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로 ‘이런 것’이였다고 그토록 기다리던 자기 안의 감각들이 일종의 연쇄적인 혁명의 물결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느꼈다. 혁명의 도미노.가 물결친다. 아까 이보가 놓쳤던 화장실에서의 기억나지 않던 그 낙지를 둘러싼 감정이 영영 이별은 아니었구나하며 곯은 뱃속이 부풀어 올랐다. 흘러나오는 헛 트림 뒤에 이제 이보는 비로소 뭔가를 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동안 이보는 소설을 쓰겠다고 맘을 먹고 소설가입네 하고 자신을 소개할 자리에서 작가라고 소설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실제로 이보가 써낸 소설이란 15년도 전에 신춘문예라는 모종의 공모에 응모당선한 이후 어디에도 발표된 적이 없었고 또 한때 월간지에 일련의 연재를 10회 가량 했던 적도 있었지만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좌서(左書)된 손 글씨여서 그것을 읽어냈던 이는 없었다. 그래서 그것는 실재함에도 부재에 훨씬 가까웠다. 불과 몇 달 전에서야 아는 선배가 평론을 쓰던 문예지에 첫 소설을 보내었을 뿐이다. 어느 평론가가 그의 소설을 읽고 겨우겨우 낭독제에 추천을 했다는 말을 다른 선배를 통해 들었다. 출간은 아직 꿈도 꾸지 못할 자격의 이보의 첫 소설 제목은 ‘平凡(평범)한 竪說(수설)’이었다.
여하튼 이런 이보가 어디 이보겠는가 만은 그런 이보는 지금 여기 낯선 ‘아름 뜰’에서 일각(一刻)에 일각(一覺)하고 그 외로이 돋은 뿔(一角)을 세워 한 귀퉁이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한다면 햇발(日脚)뒤에 감춰진 그 의미심장한 비밀을 연금(鍊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어쩌면 갓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가 수퍼에선 산 달걀을 품듯 품어보고 있었다. 앏은 웃음이 몰래 이보의 입가에 나왔다. 가슴이 들 떠오른 이보는 남은 시간을 아껴야 한다면서 서둘러 담배를 끄고 서둘러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서둘러 수첩을 넣고 그렇게 서둘러 아름 뜰을 일어서 UFO를 기다리는 활주로를 향해 바빠진 걸음을 걸어 내려갔다. 그 활주로가 꼭 이보만을 위한 것인 양으로 자신감에 넘쳐 있어 보였던 것은 아까의 ‘아름 뜰’을 향했던 이보와 참으로도 많이 다르게 보이고 들렸다.
헌데 이보는 그만, 너무나 배가 고팠다. 뱃속에 아귀(餓鬼)가 입을 벌리고 텅 빈 위벽과 목구멍을 탁탁 치고 있기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격납고가 좌우로 늘어선 요상한 활주로에 도착했을 때, 온갖 나라의 음식냄새가 진동함을 느끼고 격납고의 유리문앞으로 다가갔다. 헌데 왠지 이보는 이 건물안에서 김이 모락 나는 저런 류의 음식들은 아니라고 격하게 거부하는 속말을 되새김질하며 고개를 돌려 정문을 향했다. 정문 앞에 A가 붉어진 두 눈깔을 부릅뜨고 이를 뽀드득 갈면서 정문을 걸어 나오는 이보를 향해 이빨을 들이대며 복수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픈 배는 그 정도의 공포를 충분히 잊어 낼 만큼 가득 차버려 이보의 눈을 멀게하고 발걸음을 서둘게 했다. 고픈 배가 텅 빔으로 가득 차다? 어기적허비적 이보는 언제 정문을 지나쳤는지도 잊고 서툴게 이 대학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뭔가를 먹어야 한다. 무와 단무지로는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고 물로 배를 채우는 기억은 어지러웠다. 먼데를 바라보니 먼데리아가 보였다. 신기루가 아니기를 사막에 정령에게라도 간절히 빌며 화장실을 찾던 몰골보다 모자라지 않을 만큼에 수축된 몸을 바짝 세웠다. 이보는 찬바람이 부는 사막을 서둘러 건너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힐끔 뒤를 돌아다보아도 다행인 건지 A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았다. 뒤이어 아주 약간의 서운한 바람이 불기도 하였다.
먼데리아에는 새우버거가 있다.
먼데리아에는 커피가 있다.
먼데리아에는 감자튀김이 있다.
먼데리아에는 청춘이 있다.
먼데리아에는 패스트한 수다가 있다.
먼데리아에는 할인되지 않는 이보의 허기와 간절한 신용카드의 초박(超薄)한 한도액이 남아있다.
주문한 버거를 기다리는 내내 먼데리아 칭송가를 작곡이라도 해볼 심사인지 먼데리아의 풍경을 소리 내어 그렸다. 아마도 이보를 본 사람들은 어느 먼데리아나 찾아오는 이상한 아저씨라고 여겼을 것이다.
17번 대기표를 들고 이보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 숫자가 마치 처음부터 받아 쥐고 태어난 이보만의 소수(素數)이거나 이 누추한 운명을 바꿀 황금 숫자라거나 이보의 나이이거나 이보가 먼데리아에 열일곱 번째 내방한 것일 거라고 이보는 거짓말에 살을 붙여보았다. 그것은 바싹 말라 초조해진 배를 달래어 보는 일만은 아니었을 게다. 먼데리아에는 허기진 배를 위해 허기진 웃음을 짓다가 허기진 동공을 좁혀가며 허기진 관계를 수다로 채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보는 그게 일말의 위안이라고도 느꼈다. 부르르. 17번 대기표가 몸을 떨다 붉은 눈물을 흘렸다.
허겁지겁 순식간에 이보는 새우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어치우고 발칵발칵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배가 차는 게 느껴질 만큼 굶주린 이보는 후우 하며 긴 숨을 쉬어본다. 대체 이런 배 곯리기란 올해 들어 처음이어서 그만 멍해진 이보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대관절 무엇에 속아 이런 골탕을 당하는 것인지를 연구하려했다가 갑작스런 공복이 채워지며 아무래도 깜박 누전(漏電)이 되어버려 낯설지 않은 숲 속으로 빠져버렸다. 이보의 눈이 무겁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보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이보는 이 여자 아는 얼굴인 데하며 우리 언제부터 아는 사이죠? 하고 밑도 끝도 닿지 않는 말을 질문이라고 말끝을 올렸다.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건 분명 ‘오랜만이야’라고 이보에게 들렸다. 낯이 많이도 익은 그 여자는 조용히 웃다가 ‘이제 나를 때려’라고 하고 이보는 그 말이 귓전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뺨을 후려 갈겼다. 여자는 고개를 다시 돌려 이보를 보았고 이보는 그 여자의 경멸에 찬 눈이 하는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시키는 대로 한 번 더, 좀 전 보다 세게 팔을 휘둘렀다. 그건 어색했다. 가련해진 여자는 두 대의 뺨을 내놓고나서야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있어’ 라고 말했다. 그만 미안해진 이보는 함께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로 했다가 여기는 아마도 그 여자가 아이를 버린 곳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이 여자는 뭐지?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이보는 여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간 건지 들어선 건지 시장이 있었다. 긴 시장골목 끝에 문이 보이고 문을 열자 숲이 있다. 숲길 끝에 다시 문이 있고 문을 열자 유치원으로 보이는 복도가 있지만 유치원에는 아무도 없다. 유치원 복도 끝의 문을 열자 긴 서고가 있다. 도서관인가 하지만 그곳도 역시나 아무도 없다. 다시 서고 끝에 있는 문을 향해 걸었다. 한쪽 창 밖에서 한 여자아이가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이보는 앞서던 여자를 불러 창가에 세우고 창 밖에 여자아이를 가르켰다. 여자는 창을 두드리며 목청껏 아이를 불렀는데 여자의 고함이 아이에게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그 고함소리가 바로 옆에 선 이보에게도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창밖의 아이는 놀다가 말고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여자는 건물 모퉁이로 사라진 아이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유리창 위에 주먹을 쥐고 흐느꼈다. 그런데 그런 때, 이보는 어째서 인지 이 여자를 범(犯)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고 동시에 이보의 허리아래 불끈 시도 때도 없이 뜨는 해에 휘둘리는 남세스러운 남도(南道)가 더워졌다. 여자는 울고 있고 이보는 여자의 옷을 헤치기 시작했다. 여자는 놀라서 주춤거리며 힘을 쓰고 있다. 그 눈이 이보에게는 전혀 다르게 읽혔는지도 모른다. 이보는 여자의 뺨을 다시 쳤다. 서투른 손으로 서두르며 이보는 여자의 치마를 들추고 속곳을 잡았다. 긴 서고(書庫)의 책들이 스믈스믈 기어 나오며 쑥덕댄다. 이보는 한 손으로 여자의 목을 조르며 여자의 다리사이로 이보를 닮지 않은 이보의 고깃덩어리를 꺼내 밀어 넣었다. 이보가 아닌 이보의 고깃덩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여자는 눈이 커지고 입이 커지며 찡그린 미간의 고개를 돌렸다. 이보의 손은 이보의 생각과는 다르게 여자의 목을 더 세게 조르고만 있었다. 이보의 남도에서 여자의 치마아래까지인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 것인지 피가 쏟아지고 핏덩어리가 이보의 낡은 신발위에 떨어져 녹아내렸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소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아무소리도 귀로 들어가지 않았다. 후두둑후두둑, 핏덩이들이 바닥에 흥건하다. 눈과 입을 벌린 여자는 벽에 기대어 쓰러지기 직전이고 여자의 다리 아래로 핏덩이로 범벅이된 신발을 벗어놓은 이보는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찡그리고만 있는 여자의 옆얼굴로 어느새 다가가 ‘내 아이였구나.’ 속엣말을 입 속에서만 하고 제 입 속에다가 도로 토해버렸다. 이보의 입안에서 비린내가 났다. 그곳은 귀였을 뿐이야. 침을 뱉어가며 이보는 나머지 한쪽 귀를 막고 맨발로 서고를 도망쳐버렸다. 서고 끝에 있는 문을 열자 다시 숲이었다. 도망쳐야한다. 도망쳐야한다. 이보는 허리띠를 여미지도 못하고서 왼손으로 바지춤을 잡고 펄쩍펄쩍 숲을 내달렸다. 갑자기 숲이라니? 바닥에 질질 핏자국을 늘어트리고 도주하는 이보에게 놀란 서고의 책장이 모두 쓰러져버렸는지, 그 탓에 책들은 모두 책장(冊張)을 푸득여 서고 위로 날아가 버린 건지, 피를 뒤집어 썼을 낯이 익은 저 여자는 어찌하고나 있을 건지, 아까 끝 문을 열었을 때 유치원도 시장도 아닌 숲인 건 왜인지. 이보는 그만 턱 삐쳐 나온 나뭇가지에 걸려 공중으로 떠올라버린 잠시에서야 걱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느리게 빙그르. 신발은 왜 두고 왔는지, 이 축축한 피는 다 이보의 것인지. 걱정이 흘러버린 것이다. 덜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