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

이보슈, 오늘은 꽝일세

異甫竪 一日橫

by Inan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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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 안에 뽑기 냄새가 군밤 냄새와 섞여 가득하다. 이보는 7번 출구를 찾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낸 이들에게는 아직 답이 없고 메시지를 보내 온 이들에게는 답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이보는 결정을 해야 했다. 헌데 이보는 그 결정의 목적을 알아내지 못한 이유로 걸음을 주춤거리며 이리 우왕 저리 좌왕하며 당최 잃어버린 일곱번째의 탈출구를 찾을 뿐이었다. 도대체 왜 너희들은 답이 없는 거냐?


C와는 그 길로 이어졌다. 연중 내내 가뭄인데도 C의 땅은 잔뜩 젖어있었고 그게 마냥 부끄러운 이보는 목이 마른 늙은 사슴의 못된 버릇으로 샘의 물을 모두 비워낼 기세였다. 그건 굶주린 자의 본능이 아니고 처절한 생의 비극이라고 C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이 취해서는 막힌 하늘의 어딘가를 올려다 보며 웅얼댔다. 이보는 그 웅얼거리는 울림을 막힌 하늘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였는지 ‘우린 마찬가지야’ 라고 지금은 잊혀진 옛날의 노래 가락을 꺼내들지만 C는 그 노래를 알지 못했고 불통에 순간 그 새(時)는 날아갔다. 물론 이보는 그 새를 붙잡고는 싶었지만 설득력이 없었고 날아가버린 그 새가 씹새이든 개새이든 이보와 함께 다정히 물을 마시지도 않았음으로 그만 노래가 불러낸 그 사이(時)를 잊기로 했다.

C의 샘은 우기(雨期)를 맞은 댐인양 수문을 닫아도 계속 흘러 넘쳤고 해갈을 마치고도 남아 배가 불러올 지경인 이보는 혹시나 멈추지 않는 이 얕은 샘물에 빠져 익사할 지도 몰라 슬슬 겁이 나기도 차오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기구하고 처절한 이보보다도 더 기괴할 팔자일지도 모를 C의 샘에서 출렁이는 파도속의 갖은 발악과 악바둥을 치던 C의 거대한 그늘은 차오르는 수심과 좁아지는 벽으로 이보라는 먹이를 서둘러 삼켜버리기 시작했다. 목이 마른 수준의 갈증이 아니라는 듯 네 개의 다리가 이보의 몸통을 붙들고 두 개의 팔은 이보의 등을 감싸안고 나머지 두 팔이 이보의 관자놀이를 쥐고 C의 목 아래에서는 붉은 빨판이 이보의 목걸미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자꾸만 조여 오는 C의 다리악력에 잔뜩 오그라 든 이보는 겨울 밤 길고양이 만큼 긴 비명을 지르기도 해보았던 것이지만 소리는 어디로도 울리지 못했는데, 혹시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면 그건 차라리 이보의 가느다란 신경줄이 몸 곳곳에서 터져 버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발가락 끝에서 쥐가 올라 오다가 우두둑, 후두둑. 뜨거운 비가 어느덧 사막으로 변한 우물가에 내리고 쥐었던 가지에 힘이 빠진다. 후둑 내렸던 그것은 꿀이 되기를 바랬을 수도. 쿨이 되기를 바랬을 수도 있겠다. C의 배 위에서 밤꽃이 피려는지 시큼했다. 미끄덩거리며 흡수되지 않는 액체는 꿀도 쿨도 못되어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 테지만 C의 배 위에서 밤나무가 자라날 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런 기대를 하는 이보는 한숨을 뱉어 이제 온 몸에 힘을 빼고 다시 말라가는 C에게로 고꾸라졌다. 빌어먹을. 아직 따뜻하네. 증발, 기화되어가는 에네르기여.


C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각자 알지 못하는 노래를 하나씩 나눠가지고 익명의 다음 날을 약속하고 서로에게 주어진 지하도를 향해 갈라섰다. 익사에 실패한 이보는 이제 유일한 마지막 통로를 나와 도주하는 망명자로 이름을 갈아입고 황망히 지하도를 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7번 출구를 포기해야하는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지하통로 안을 헤매던 이보는 아무 쪽으로나 나가자고 서둘러보았다. 헌데 이보가 지하도에서 좌왕우왕하는 그 이유란 지하도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들어서있는 유리벽으로 된 화랑 때문이었는데 그 지하화랑에서는 대단한 비밀 집회나 앙팡테러블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고작 환경을 사랑하는 사진가들이 남한의 환경보존 지역을 촬영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디지털 사진에 의한 디지털 프린트를 통한 오프라인 전시라니. 액자는 나무였고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프린트 용지는 수입 종이일 것이다. 유리벽 너머의 공간에서 유리 안에 담긴 환경에 여전히 이보는 가슴이 답답해져 버렸다. 이따위 답답한 가슴 따위 쉽게 버려버렸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며 제 가슴을 자꾸만 재활용하는 이 바보는 이보일 뿐이었다. 이보는 잠시 7번 출구를 잊고 그 환경에 대해 근심해보았다.

지구의 환경을 위해서라면 가장 효과적인 운동이란 역시 저출산이 아닌가. 무산이 아닌가. 인구의 증가에 따라 자연히 늘어난 환경의 침해나 오염, 파괴는 인간의 종족보존 본능을 거룩한 무산으로 최대 최고의 재생효과를 낼 수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결국 소수의 인간만 남아서 최소의 소비를 하다보면 지구환경도 나아지고 인류애까지도 되살릴 수 있잖은가 말이었다. 성의 문란함이 문제가 아니라 종족보존의 욕망이 문제라고 이보는 감히 확신하기로 해보았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사람이 소중한 지도 모르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써야하는 자원도 모자라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계급도 따라 많이 나누어지는 뭐 그런 거 아닌가. 인간의 수가 혁명적으로 줄어들게 되면 인류도 환경도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거라는 소리. 어쩌면 가장 핵을 많이 보유한 국가일수록, 핵 위험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인류를 걱정하고 환경을 염두에 두는 곳이나 아닐까하는 생각들이 연타석 홈런처럼 이보의 염두(念頭) 속에서 펑펑 핵분열을 일으키며 터졌다. 그놈에 디지털이 만드는 수많은 양의 디지털 기기들은 쉬지도 않고 이 ‘느림’이 빠르게 팔리는 시대에서 정말 잠시라도 쉬지 않고 물건들을 생산해 내고 있잖은가. 그 많은 양의 물건들이 만드는 필요와 요구에 대한 자원의 대처는, 자연의 처지는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을 말하는 일은 대체 가당키나 하다는 말이냐. 이건 마치 소비를 부추겨야만 이익이 발생하는 업계들에서 환경이니 그린이니 오가닉이니 따위를 제 물건들에 둘둘 말아 팔고 있는 것과 얼마나 다르다는 것이냐. 환경을 생각하는 전자제품들과 의류들과 물류들이란 대체 정체가 뭐냐. 대갈통에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는 그놈에 이성적 두뇌가 존재라도 한다면 최소의 소비만이 최고의 노력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이냐. 심심하면 차라리 노래를 하자. 제발 느리게 걷기 따위의 구호를 외치며 느림의 깃발을 빠르게 펄럭이는 장사치들의 마임에 연극에 놀음에 도망이라도 치란 말이다. 싸워야할 대상을 밖으로 설정하는 모든 말들은 완벽하게도 살아있는 뻥일 뿐이다. 거짓말.

하지만 사람은 거짓말을 좋아 하고 아마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건 배신이라고, 그만 거짓말이라는 진심에 배신당한 이보는 푸르륵. 순식간에 절망하였다.

사실 이보는 사막에서부터 며칠간을 앓고 난 뒤였고 고열과 치통에 시달리느라, 처방약에 들었던 성분 탓으로 가물가물 뇌가 물렁해지기도 해서 비극적 상황을 두고도 헤벌쩍 웃자는 얘기를 하는 꼴에 탓할게 많기도 많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칼이 있거나 말거나 칼자루를 쥔 것은 분명히 인간일 것이라는 막연한 진리. 오로지 이보는 일말(一抹)의 기대로 그 진-저-리를 붙들고 있는 꼴이었을 뿐, 이보의 고개는 늘어졌고 어깨는 처져 있었다.


어디로 나온 출구를 통한 건지 모르던 이보는 어느 대형서점 앞을 걷고 있었고 그러면 서점에라도 들어갈까 하다가 길 한편에서 확성기를 쥐고 열변을 토하는 한 각설이의 쉰 목소리에 끌려 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점 앞에는 낯이 익은 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언가 간곡한 심경을 절규하듯 토해내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지나는 사람들은 그의 눈에 자신들의 눈을 맞추려 들지 않았다. 그 중늙은이는 청년의 소리로 민란을 꿈꾼다고 하고 난리 난 세상을 바꿔야한다고 하고 오만 송이의 꽃에서 백만 송이로 나간다고도 했다.

아마도 각설꾼은 동학을 재현하려는가 보다고 이보는 잠시 타령에 겨워 가야할 길도 잃고 멍하니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을 애써 떠올려보고 그리워해 보려했다.

산을 타고 넘는 이들과 산방에 숨어들어 추위에 떨던 모습과 낡은 책을 반닫이 깊숙이 감추던 그림자와 그 책을 자식에게 건네며 아무에게도 보이지 말라던 할배의 유언 따위가 그려졌다. 이보는 부는 바람에도 춥지가 않아졌고 기억나지도 않는 그 얼굴들이 너무나 그리워, 답답하던 가슴이 먹먹하게 더워지고 눈가가 뜨끈해 지지고 목구멍이 후끈후끈 울컥해졌다. 한데 잠시 뒤에 그림 안에 얼굴들은 이보보다 빨리 울고 있었고 아파하고 있었고 목이 잘리었고 파묻히고 지워져갔다. 이보는 그만 할아버지? 라고 불러보았지만 할배는 묵묵하게도 입을 다물고 손자의 물음에 눈을 감아 답했다. 지워지고 지워져 손자는 할배의 매달린 모가지도 떨어진 몸뚱이도 찾지 못하였다.

원하는 자와 원치 않는 자와 원하지도 원치 않는 것도 아닌 자가 이보의 주위에 서성이며 이보를 감시하고 도청하고 부추기고 윽박지르고 전단을 나누고 전단을 뺏고 있었다. 무엇이 먼저인지 이보는 흔들렸는데 아마도 그것은 유령의 외침들에 이보가 망연히도 홀려버린 탓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틀렸다는 것보다는 많이 다른 길을 이만큼이나 와서 이보는 노바디(Nobody)란 이름의 제 할배와 잠시나마 각설꾼의 타령으로 재회했던 게다. 하지만 할배를 본 적이라고는 없으니 재회란 말은 초면에 실례가 많은 말이기도 했다. 참 많이도 다르지 않고 많이도 달라 보이는 혁명의 다른 두 길. 어느새 이보는 다시 그 갈림길 앞에 와 있기라도 한 것인가? 해도 항상(恒常)처럼 이보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택했었다. 길이 아닌 길을 길이라 우겼고 그 길 끝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겠지만 그저 헤어지고나면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믿었다. 물론 이보가 다른 길을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그 길로 걸어간 이들이 교차로에서 갈팡질팡하는 꼴을 멀리서 들으며 안타까워하기도 하였었지만 그저 이보는 이 길뿐이라고 길이 아니라 불리는 제 길을 걸으며 진심을 다해 배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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