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

이보슈, 오늘은 꽝일세

異甫竪 一日橫

by Inan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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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 저 밖에서 전국을 떠돌며 각설하는 품바마냥 잔치판을 도는 그의 민란이란 것은 대체 가능하기나한 공식인가? 혹 그 외침은 이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외치는 절규일 뿐이겠는가? 그 민란의 핵심이란 사람(民)이어야 할 텐데 그것은 10년도 더 된 시간을 거슬러야 할 듯 보이는데, 대체 그는 뭐 이런 뒷북을 치고 또 다시 치려는 것인가 말이다. 해서 뒤돌아 슬쩍 보면 이 각설이란 몇 년이라도 전에 등퇴장하였던 낯익은 품바인데 그 시절의 그는 흥행에 성공하여 그 각설로 스스로를 증명한 바 있었다. 아쉬울 것은 올빼미 바위라는 깨달음의 꼭대기에 올랐던 무척이나 젊은 어느 늙은 청년의 투신으로 씨가 자라 곡식을 거두는 농사의 참맛을 얻지 못한 것이겠지만, 이미 타령은 많이도 다르지 않게 들리는 것이 설(說)하기 조심스럽기는 해도 뚫린 입에 팔랑이는 혀 탓으로 생각만 해보자고하면 이보에게는 택도 없는 난리굿을 펴는 듯이 보이기도 보였다. 다행이도 이 각설 꾼에게 격려가 되는 일은 바위를 뛰어내린 늙은 청년을 기다리는 추모객과 타령의 필요성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한두 푼이라도 곁들여 애쓰고 있음과 그 수가 느리지만 조금씩이나마 늘어가고 있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슬프게도 분명하게 다른 것을 잠시나마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어쩌면 그 다름을 잊은 탓에 스스로도 어지러워하고 있을 지도 모르긴 몰라서 상기하자면, 뛰어내린 청년은 이미 없다. 오지 않을 청년을 기(다)리는 추모객과 함께라면 이제 뛰어내릴 자가 있어야지 않겠나. 늙은 청년이 바위에 올랐을 때에 청년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바위를 밀쳐낸 힘이 적들이라 부를 다저스의 푸른 피를 지닌 듯 행동하는 이들만은 아닌 것을. 그들이 그 높은 곳에 푸른 지붕 얹어 살기 전에, 이 각설이의 타령에 사람(民)의 마음이 돌아서는 기적이 생겨났을 때, 항상 과학적 조직은 없었다. 과학적 조직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조직이 기적의 순간에 홍해처럼 갈라지고 있었을 게다. 그걸 과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빠르게 지나는 몇 해 동안 사람(人)은 있지만 사람(民)을 잃었고 사람(民)을 얻었지만 사람(人)은 잊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토록 보기 싫어하던 깃발들과 방패들이 살아나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광화문에서 시청에서 그 처참했던 용산에서까지도 깃발은 휘날렸고 방패는 길을 막았다. 밤하늘을 가르던 꽃병만 사라졌지. 그 스펙타클은 바다를 가로막던 유조선 그대로 도로 한 복판에서 실험되어졌고 불꽃은 일어나기도 전에 국화를 담아야 하는 화분이 되어버렸다. 오호 통재라. 사람(人)의 눈물은 있어도 사람(民)의 눈물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民)의 절규가 있을 때마다 사람(衆)은 귀를 닫거나 이어폰을 꽂으며 손 전화 속으로 잠수했다. 모든 것을 구름 속에 저장하고 사람도 사람들도 밖을 지나는 자신의 걸음보다 손 전화에 연결된 말 걸음에 언 귀를 녹이고 먼 눈을 모았다. 홍수나 들불이 나야 그들은 그 손안에 사회에서 연결을 짓고 떠들 뿐이었다. 인증사진으로 찾아 온 참여가 다만 유행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트렌드였음을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인가? 이런!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보는 그저 답답했다. 아직도 멀었다고 이보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각설이 옆을 지나며 혼잣말을 해 보았다. 그 때의 에네르기는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 날아갔고 껍데기만 남은 에네르기란 구름에 있는지 손 전화 안에 두고 나왔는지 사람도 사람들도 이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덴가 있기는 있을 텐데도 에테르를 잃은 지 오래이지 않던가? 에테르가 없는 에네르기란 뭔가? 그저 깃발일 뿐이었다. 그저 방패이거나 컨테이너 앞에 막혀버릴 무력한 한숨일 뿐이었다. 민란이, 난리가, 혁명이 내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난리가 아니고 민란이 아니다. 적을 규정하고 밖의 적에게 대항하는 종류의 혁명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다. 혁명을 위한 혁명 세력이 조직을 구성하고 혁명 시기를 조율해야하는 게 대체 뭐 얼어도 못 죽을 혁명이란 말이냐. 그건 그저 이기고 나면 그 뿐일 개싸움이다. 밥그릇을 비우고 남은 밥그릇을 향해 으르렁대는 꼴을 두고 혁명이라 부른다면, 쓸쓸해도 이만저만 이보는 어지러워질 만큼 쓸쓸해 질 것이다. 이보는 바랐다. 난리가 나야할 곳은 내 안에 있는 ‘나’라는 독재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고 ‘나’란 이름의 독재와 싸우는 자가 혁명가이며 바로 그런 자기 부정되고 자기 전복된 개인적 혁명들이 연속적으로 접촉을 이루어낼 때 사람(人)의 혁명이나 혁명적 사람(民)이 나올 수도 있다는 착각에 가까울 믿음을 굳은 불신(不信) 속에서라도 꿈꾸기를 말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횡설(橫說)스럽다.

혁명이란, 추운 겨울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여자의 빨간 원피스를 들춰 올리고 차가워진 똥구녁에 더운 혀를 쑤셔 박는 것이어야 한다. 혁명이란 일종의 포르노여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할 때의 깃발 든 사람이란 금지된 장난을 하는 무서운 아해들이 된다. 무서워하는 아해들을 향한 무서운 아해들과 무서운 아해들을 향한 무서워하는 아해들. 그들은 혁명적 순간을 앞에 두었을 때에 무섭거나 무서워하는 아해(兒骸)였을 뿐이었다. 혁명은 로맨틱한 바보와 무서움을 모르는 아이의 장난처럼 시작했대도 로맨스와 무서움을 지우거나 삭혔어야하며 그 바보와 아해(兒孩)를 자라나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또 이 말은 여전히 수설(竪說)스럽기는 하다.


걸리기만 해봐 라는 심정으로 어느새 이보는 생각이 낳은 생각을 킁킁거리며 주위를 살펴 찾았지만 때는 겨울이라 지나는 개와 고양이까지도 꼬리를 내리고 있으니 꼴려 오른 말을 쏟아낼 차가운 똥구녁은 해가 다 질 때까지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저 이보마냥 발정이 난 것은 홀로 외치는 저 각설이 뿐이어서 아마 저 각설이의 타령도 접을 붙이지 못한다면 탈이 나기도 이보마냥 날 것이라고 걱정을 해보았다. 이보는 목젖을 울렁이며 절규하는 이 각설이가 어여뻤고 그를 바라보는 자신이 서글펐다. 달려가 각설이를 지독하게 끌어 안고 달이 지도록 울고 싶어졌다. 각설이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을 때 하지만 아마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급히 생각한 이보는 이보대로 지금 킁킁대는 까닭은 그저 콧물 때문이라고 해두고 서둘러 H대학 앞으로 몸을 옮기려 버스를 찾았다.

H대학 앞을 가는 버스를 보고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버스는 이보를 외면하고 달아났고 이보는 민망하게 깨달았다. 버스는 택시가 아니라서 버스였고 버스는 버스 정류소에서 선다는 것 그리고 이보가 서 있는 곳은 버스 정류소가 아니라는 것을 이보는 깨달은 것이다. 정류소도 아닌 곳에서 혁명이라는 촌스러운 버스를 다름에도 아닌 이보가 기다렸다는 말이겠다. 날던 새의 날개 죽지에 담 들리는 소리다. 이런 빌어서도 얻어먹지 못할 눈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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