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의 표식
박지훈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에 떠 있는 코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 주머니에 들어있는 작은 씨앗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은빛 달 모양의 그 씨앗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꿈의 씨앗농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했다.
*“기억의 씨앗이야. 소중한 기억들을 지키고, 잊혀진 기억들을 되살려주는 씨앗이지.”*
하지만 아직까지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일상이 계속될 뿐이었다.
“지훈아.”
옆자리의 김과장이 말을 걸었다.
“네.”
“너 프로그래밍 잘하지? 우리 팀 신입이 자꾸 실수해서 힘들어하는데 좀 봐줄 수 있을까?”
지훈이 신입사원 자리로 갔다. 이준호라는 23살 청년이 모니터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뭐가 문제예요?”
“선배… 이 부분에서 자꾸 에러가 나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요.”
지훈이 코드를 살펴봤다. 간단한 문법 오류였다.
“여기 세미콜론이 빠졌네요. 그리고 이 변수명도…”
“아, 감사합니다!” 준호가 밝게 웃었다. “선배는 정말 잘하시네요. 저는 언제쯤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때였다. 가슴 주머니의 씨앗이 미세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이마 어딘가가 살짝 따끔거렸다. 지훈은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만졌지만, 별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처음엔 다 그래요.”
“선배도 처음에 많이 힘드셨어요?”
지훈은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신입사원이었을 때를 떠올려봤다.
“저도 처음 회사 왔을 때 정말 힘들었어요. 매일 야근하면서 코드 보다가 울었던 적도 있고.”
“정말요?”
“네. 그때 저를 도와준 선배가 있었는데…”
갑자기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입사 첫 주, 자신을 도와준 최선배의 모습이. 그 선배는 지금 다른 회사로 이직했지만, 당시 지훈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 선배가 저한테 했던 말이 있어요. ‘지금 힘든 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야. 포기하지 말고 하루하루 배워나가면 돼.’ 라고 하셨거든요.”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 말씀 정말 위로가 되네요.”
씨앗이 더욱 따뜻해졌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지훈의 이마가 은은하게 따뜻해지면서, 마치 무언가가 새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울이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의 머릿속에 최선배와 함께했던 더 많은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늦은 밤까지 같이 남아서 코드를 봐주던 모습, 점심을 사주면서 격려해주던 모습, 프로젝트가 성공했을 때 함께 기뻐하던 모습…
“준호씨,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물어보세요. 선배가 저를 도와줬듯이, 이제 제가 도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선배!”
준호가 돌아간 후, 지훈은 자리에 앉아 씨앗을 만져봤다. 분명히 이전보다 따뜻했다.
*혹시 이게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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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지훈은 회사 근처 카페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었다. 마케팅팀의 서연주 대리가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지훈이 물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요즘 일이 잘 안 풀려서.”
“어떤 일인데요?”
“신제품 마케팅 기획안을 계속 수정하라고 하시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전에 했던 비슷한 프로젝트를 참고하려고 했는데, 그때 자료를 다 잃어버렸거든요.”
씨앗이 다시 따뜻해졌다. 동시에 이마의 그 부분이 다시 따끈해졌다. 그리고 지훈은 갑자기 확신이 들었다.
“혹시 그 프로젝트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세요?”
“작년 여름쯤? 7월인가 8월쯤이었던 것 같은데…”
지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IT팀이니까 혹시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그리고… 그 프로젝트 할 때 어떤 기분이셨는지 기억나세요?”
“기분이요?”
“네. 그때 뭔가 특별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순간이나, 팀원들과 함께 기뻐했던 순간 같은 거요.”
연주 대리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 그때 회의실에서 브레인스토밍 하다가 갑자기 ‘SNS 챌린지’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때 팀장님이 정말 좋아하셨고, 실제로 대박이 났었죠.”
“그럼 그 느낌을 다시 떠올려보세요. 그때의 창의성, 그때의 열정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연주 대리의 눈이 점점 밝아졌다.
“맞아요! 그때 정말 재미있었어요. 새로운걸 만든다는 기분이 좋았고… 지금도 그런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을 텐데.”
그 순간, 지훈은 이상한 경험을 했다. 이마가 은빛으로 따뜻하게 빛나는 것을 느끼면서, 연주 대리의 머릿속에 있는 그때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밤늦게까지 아이디어를 정리하던 모습, 팀원들과 열띤 토론을 하던 모습, 프로젝트가 성공했을 때의 뿌듯한 표정…
“연주 대리님, 그때 사용했던 핵심 전략이 뭐였는지 기억나세요?”
지훈이 물어보자, 연주 대리가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요. ‘감정적 연결’이었어요. 단순히 제품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고객들의 감정과 연결시키는 거였죠.”
“그럼 이번에도 그 전략을 사용해보시면 어떨까요?”
“맞아요! 왜 그걸 못 생각했을까요? 지훈씨, 정말 고마워요. 갑자기 아이디어가 막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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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지훈에게는 더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총무팀의 이과장이 찾아왔다. 50대 중반의 조용한 분이었는데, 평소에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지훈씨, 죄송한데 부탁이 하나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제 아버지가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셨거든요. 요즘 자꾸 옛날 일들을 헷갈려 하세요. 혹시 IT 쪽에서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이 있을까요?”
지훈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어떤 종류의 기억을 잃어가고 계시는지…”
“주로 가족들 얼굴이나 이름을 헷갈려 하세요. 그리고 젊었을 때 일들을 자꾸 물어보시는데, 저도 잘 모르겠거든요.”
씨앗이 이전보다 훨씬 뜨거워졌다. 이마의 표식도 더욱 강렬하게 빛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훈은 확신했다.
“과장님, 혹시 아버님과 함께 찍은 오래된 사진들이 있으세요?”
“네, 있어요.”
“그럼 그 사진들을 디지털로 정리해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앨범을 만들어드리는 건 어떨까요? 각 사진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찍었는지 설명을 적어두고.”
“아,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그리고 아버님이 젊었을 때 이야기를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녹음해두면 어떨까요? 나중에 아버님이 그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과장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정말 좋은 방법이네요. 왜 그걸 생각 못 했을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앨범 정리하고 앱 설정하는 것도 도와드릴게요.”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지훈씨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아세요?”
지훈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저희 할머니도 치매를 앓으셨거든요. 그때 제가 많이 후회했어요. 할머니와의 추억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했다고.”
“그랬구나…”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중요한 건 기억 자체가 아니라 그 기억 속에 담긴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님도 분명히 과장님에 대한 사랑은 절대 잊지 않으실 거예요.”
이과장이 지훈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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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지훈은 집에 돌아와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마에 작은 초승달 모양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은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초승달이었다.
*정말로… 마법인 거구나.*
지훈은 씨앗을 꺼내봤다. 이제 씨앗이 작은 전구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다.*
하루 종일 사람들의 잊혀진 기억들을 되살려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씨앗이 더욱 밝아졌다.
신입사원의 성장에 대한 기억, 마케팅 대리의 창의적 순간에 대한 기억, 과장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기억…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이 능력은 단순히 정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소중한 감정들, 힘이 되었던 순간들, 사랑했던 시간들을 되찾아주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그날 밤, 지훈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자신은 작은 다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다방이 아니었다. 벽에는 무수히 많은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테이블마다 오래된 앨범들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어떤 아이였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아버지와 함께한 좋은 추억이 있었던 것 같은데…”
“첫사랑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흐려져요.”
지훈은 그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들의 잃어버린 기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났다.
꿈에서 깨어난 지훈은 미소를 지었다.
*추억다방.*
그게 바로 자신의 역할이구나. 실제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만들어주는 추억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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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부터 지훈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에서 누군가 힘들어할 때면 자연스럽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이 잊고 있던 소중한 순간들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스트레스로 지친 동료에게는 처음 입사했을 때의 열정을 기억나게 해주었고,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후배에게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리고 씨앗은 날이 갈수록 더욱 밝게 빛났다.
한 달 후, 사무실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과거의 좋은 경험들을 공유하며 격려하는 일이 많아졌다.
“지훈씨 덕분에 요즘 회사 다니는 게 즐거워졌어요.”
준호가 말했다.
“저는 뭘 한 게 없는데요.”
“아니에요. 선배가 저한테 해준 말들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았거든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선배와 이야기하고 나면 다들 밝아져요.”
지훈은 가슴 주머니의 씨앗을 만지며 생각했다.
*할머니, 저 이제 정말로 사람들을 도우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나처럼 씨앗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꿈의 씨앗농장에서 꿈지기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일곱 명의 새로운 꿈지기들.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라고 하셨는데, 과연 언제일까?
지훈은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자신처럼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씨앗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