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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함께 낡아지지않고 깊어지는 건 와인과 사람뿐

by inarose



마음챙김 교육 시간, 강사가 물었다.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이 뭔지 아세요? 암보다 더 두려운 건 치매입니다.”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암은 몸의 병이지만, 치매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병이니까.


때때로 미치도록 잊고 싶은 기억들이 있다. 후회스러운 순간들, 아픈 상처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그런 기억들까지 더듬으며 ‘내가 누구인지’ 붙잡고 살아야 하는 존재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누구인지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무미할까. 그 순간 깨달았다. 나를 좀 더 돌봐야겠다고.


얼마 전 큰 상실을 겪었다. 처음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게도 해방감 같은 게 들었다. 무엇인가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직감이었다. 예전에는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을 싫어했다. 아픈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잔인하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정말 깊은 아픔을 지나온 사람들을 보면, 일반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자애로움과 단단한 내적 자존감이 있다. 그들은 다르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알고, 사소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도 조금씩 그렇게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긴다.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두려움이 아니라 호기심과 기쁨이다. 그리고 그 평온함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사람과는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혹시나 싶어서, 외로울까 봐 모든 관계를 붙잡으려 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내가 소중하다는 걸 안다.


잘 자고, 잘 챙겨 먹고,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는 것. 결국 남는 건 그런 시간들에서 얻어온 기억뿐이다. 우리는 매번 초기화되는 인공지능과는 다르다. 어제의 웃음도, 작년의 눈물도, 오늘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을 바라보며 느낀 평온함까지도,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내일의 나를 만들어간다.


그래서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이 단순한 시간 보내기가 아니라 나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재료들이라는 걸 이제야 안다. 자부심을 갖자, 인간이라는 것에. 우리는 시간과 함께 깊어지고 아름다워지는 존재니까.



*기억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이미 충분히 축복받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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