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렁함과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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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루즈핏 셔츠에 푹 빠져 있다. 더운 날씨에 몸에 붙지 않는 린넨 소재의 셔츠는 여름 데일리 룩으로 완벽하다. 파란색, 하얀색, 하늘색 스트라이프까지, 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셔츠들을 돌려 입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데일리 룩을 정해놓고 손이 가는 것들만 골라 입으니 선택의 고민도 줄어들고,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망설이는 시간도 사라졌다.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건, 5-6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옷장 풍경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다. 비슷한 스타일의 원피스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고, 격식 있는 자리에만 입고 갈 법한 옷들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의류 쇼핑몰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항상 '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때 내가 구입하는 옷들은 대부분 "저건 특별한 날 입어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예쁘지만 불편한 옷들이었다. 평소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그런 옷들이었다.
단 몇 년 사이에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행동 패턴이 달라지면서, 입는 스타일도 자연스럽게 변했다. 이제는 쇼핑몰에 들어가서 불편한 옷을 보는 일이 거의 없다. 안 입는 옷들은 대부분 정리했고, 중요한 날 입을 몇 벌을 제외하고는 평소 입는 옷은 모두 데일리 룩으로 편안한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웠다. 이렇게 변하고 나니 너무 편안하고, 이런 내 모습이 왜인지 마음에 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특별히 꾸미지 않았는데 말이다. 전에는 정말 격식 있는 오피스 룩의 원피스와 7cm 이상의 하이힐만 고집하며 신고 다녔다. 그때는 매일매일이 몸이 경직되어 있었고, 아무리 꾸며도 내가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헐렁함에서 오는 여유로움과 편안함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행동해도 불편함이 없고, 색이나 소재도 쾌적하고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러니 자주 손이 가는 옷이 되어버린 것이고, 그런 선택을 늘려가니까 내 자신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문득 떠오른 나만의 비밀스러운 습관이 하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독한 팔자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초등학생 때까지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좋아해서 조심성 없이 뛰어다니다가 세 번 정도 교통사고로 작은 타박상을 입은 경험도 있고, 차분함과는 거리가 먼 늘 우악스럽고 천방지축인 여자아이였다. 할머니는 늘 내게 "넌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할 만큼 여성스러운 아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라면서 사춘기를 지나고, 주변 사람들의 교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여자가 팔자걸음으로 걸으면 보기 흉하다", "앉을 때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흉하다" 등의 말들. 내가 입고 다니는 옷들이 대부분 치마였던 점, 보여지는 가치가 정말 중요하다고 믿었던 점들을 통해 나는 살아오면서 '별로 보기 좋지 않은' 습관들을 조금씩 교정해왔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정리정돈 못 하는 성격을 많이 개선했고,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 모습도 조금은 차분해졌다. 신중하고 깊게 생각하는 모습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 고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걸을 때 팔자걸음으로 걷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난 팔자걸음으로 걸을 때 가장 나답다는 생각이 든다. 구두를 신지 않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팔자로 걸으면, 뭔가 자신감 넘치는 대장부 같은 느낌이랄까. 이건 나만 은밀하게 느끼는 가장 나다운 모습인데, 내가 나다운 게 좋은 모습 중 하나다.
때로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학습하며 살아간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우리의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들 중 일부는 다듬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틀에 맞추는 사람이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아는 나만의 모습,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나다운 모습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선택들이 마음에 드는 순간들이 많으려면,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모습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과정들은 채굴되지 않았던 보석을 스스로 채굴해서 나만의 방식으로 다듬어 선보이는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다듬어진 모습은 일부러 딱딱한 틀에 맞추지 않아도, 헐렁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가장 나다운 모습이 되지 않을까? 루즈핏 셔츠를 입고 팔자걸음으로 걷는 오늘, 나는 조금 더 나답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이 왜인지 가장 좋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