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천천히 시작해보자"
거울 앞에 서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아침 7시 30분,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난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멈춰 섰다. 어제 밤 노트에 적어놓은 다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 찾기 프로젝트 - 이수현 ver.2.0"
거창하게 적어놓고는 정작 첫 번째 미션인 '거울 보고 나에게 인사하기'부터 막혔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어색할까?
"안녕... 수현아?"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3년 만에 거울 속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항상 급하게 세수하고, 화장하고, 머리 정리하고... 정작 '나'는 본 적이 없었나보다.
거울 속 이수현은 생각보다 많이 지쳐 보였다. 눈가에 작은 주름이 생겼고,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언제 제대로 관리한 게 언제였을까? 끝이 갈라져 있고, 윤기 하나 없이 푸석푸석했다.
언제부터 이런 표정이, 이런 모습이 기본값이 되었을까?
뒤를 돌아보니 방 상태도 나와 비슷했다. 침대 위에는 벗어놓은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화장대 위는 쓰다 만 화장품들과 영수증, 동전들이 뒤섞여 있었다. 바닥에는 택배 박스 몇 개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져분하게 살았을까?
띠링-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출근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오늘은 뭔가 다르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침대 위 옷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 옷장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빨래할 것, 다시 입을 것, 버릴 것으로 나누니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화장대 위도 간단히 정리하고, 바닥의 택배 박스들도 접어서 현관 앞에 정리했다.
15분 만에 방이 훨씬 깔끔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 마음도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거울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머리카락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진짜 너무했다. 마지막으로 미용실에 간 게 언제였지? 적어도 6개월은 넘은 것 같았다.
"오늘 퇴근하고 미용실 가자."
거울 속 나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오늘도... 수고할 거야. 그리고 오늘은 나를 좀 더 챙겨보자."
거울 속 나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뭔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어제 인터넷에서 찾아본 '셀프러브리셋'에 대한 글들을 다시 읽어봤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타인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의 전환" "작은 변화로 시작하는 큰 변화"
단어들은 좋아 보였지만, 막상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막막했다. 그때 한 블로그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다.
"완벽한 계획보다 작은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래, 완벽하지 않아도 시작은 했으니까. 방 정리부터 미용실 예약까지, 뭔가 벌써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에 도착해서 평소처럼 책상에 앉았는데, 뭔가 다른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나'에게 조금 더 신경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점심시간에 핸드폰으로 집 근처 미용실을 검색했다. 리뷰가 좋은 곳으로 골라서 퇴근 후 시간으로 예약을 잡았다. 이런 작은 일인데도 왜 이렇게 설레는 걸까?
오후에 동료 민정이가 다가왔다.
"수현아, 오늘 야근 어때? 프레젠테이션 자료 다같이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은데."
평소 같았으면 자동으로 "응, 좋아"라고 답했을 텐데, 이상하게 한 박자 쉬게 되었다. 아침에 거울 앞에서 만난 지친 내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미용실 예약도 생각났다.
"어... 민정아, 미안한데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아.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엥? 수현이가 야근 싫다고 하네? 신기하다. 무슨 약속인데?"
"음... 나 관리하는 약속?"
민정이 농담조로 웃었지만, 내 마음은 복잡했다. 이게 맞는 걸까?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뿌듯하기도 했다.
퇴근 후 미용실에 갔다. 3년 동안 계속 같은 스타일만 유지해왔다고 하니, 디자이너님이 놀라며 변화를 제안해주셨다.
"고객님, 얼굴형에 레이어를 좀 넣고 컬러도 조금 밝게 해보면 어떨까요? 훨씬 생기 있어 보일 것 같은데요."
"네, 좋아요. 뭔가 달라지고 싶어서요."
머리를 자르고, 트리트먼트를 받고, 살짝 염색까지 했다. 2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거울을 봤을 때,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우와, 완전 달라지셨네요! 훨씬 젊어 보이세요."
디자이너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언제 마지막으로 내 외모에 대해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을 들었을까?
집에 돌아와서 정리된 방에서, 새로운 헤어스타일로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아침의 그 지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늘 정말 수고했어, 수현아. 예쁘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전혀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진심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노트를 펴들었다. 첫 번째 페이지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2024년 3월 18일 (월)
오늘 처음 해본 것:
거울 보고 나에게 인사하기
방 정리하기 (15분 만에!)
미용실 가기 (3년 만에 스타일 체인지)
야근 거절하기
오늘 느낀 감정:
어색함 (거울 앞에서)
뿌듯함 (방 정리 후)
설렘 (미용실 예약할 때)
죄책감 (야근 거절할 때)
기쁨 (새로운 헤어스타일)
만족감 (하루를 돌아볼 때)
내일 해보고 싶은 것:
아침 인사 좀 더 자연스럽게 하기
새로운 헤어스타일 관리법 알아보기
점심 혼자 먹어보기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뭔가 확실히 시작은 한 것 같았다. 외적인 변화가 생기니 내적인 변화도 따라오는 게 신기했다.
그때 갑자기 마음속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누군가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잘했어, 수현아. 오늘 네가 한 모든 일들이 자랑스러워. 방 정리부터 새로운 헤어스타일까지, 네 자신을 위한 선택들이었어.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이런 작은 변화들을 계속해보자."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어릴 때 아프거나 힘들 때면 들을 수 있었던, 그런 따뜻한 목소리.
나는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작게 적었다.
"고마워... 엄마."
아니, 엄마가 아니었다. 이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나 자신을 위한 목소리였다.
혹시 이게 셀프러브의 시작일까?
정답은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친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말 좋았다.
내일도 거울 앞에서 시작해보자. 새로운 모습으로, 조금 더 자연스럽게, 조금 더 따뜻하게.
오늘의 작은 변화:
거울 앞에서 나와 인사 (어색하지만 성공)
방 정리로 마음도 정리 (15분의 기적)
3년 만의 헤어스타일 체인지 (완전 새로운 나)
첫 번째 건강한 거절 (죄책감 있지만 성공)
나만의 목소리 발견 (따뜻하고 안전함)
엄마 리나의 한마디: